• 2015년 9월 5일 베드로전서 1:22-25,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짜 : 2015. 09. 10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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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95일 베드로전서 1:22-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쉽게 악에 치우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분명하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다보면 우리도 깜짝 깜짝 놀랄 만큼 악한 생각을 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불의한 일을 당하다보면, 복수심이나, 분노를 표현하면서 내면에 가득찬 우리의 무서운 성품과 자아를 발견하게 되어 집니다. 나쁜 사람이 험상궂게 생기고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이 되었는데, 멀쩡하게 생기고, 말씨도 부드럽고, 매너도 잘 지키는 사람들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죄악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꽁꽁 감추고 살아갑니다.

        최근 드라마 추세는 이렇게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평범한 사람이든지, 모범이라고 불려지는 사람이라든지, 정말 교통신호 한 번 위반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끔찍한 죄를 짓는다는 이야기가 많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마치 아무렇치도 않다는 듯이 살아가는 삶,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사는 삶, 과거에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가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삶이 있지만, 그렇게 안과 밖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세운 신조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것저것 주워들어서 그것을 대충 짜깁기해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자기 기준으로 정의를 내리고, 자기가 정한 기준에 맞춰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분명하고 정확한 인생 기준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일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저는 힌디어 알파벳을 배우고 있습니다. 누구는 하루면 다 읽고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이게 잘 안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힌디어 알파벳을 쓸 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글자를 쓸 때 한두 번은 원래 글자를 보고 쓰다가, 서너 번 부터는 잘 안 보고 제 생각대로 씁니다. 한참을 쓰다가 맞겠지 라고 원래 글자를 보면, 어딘가 모르게 원래 힌디 알파벳과는 다르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씩 쓸때마다 귀찮지만 원래 글자를 분명하게 보고, 따라서 씁니다. 그래야 바르게 쓸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베드로전서에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이렇게 하면 깨끗하게 되겠지!” 가 아니라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매일 같이 제대로 가는 것 같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베드로 전서는 우리가 매일의 삶속에서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이제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겠다는 분명한 방향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그분의 뜻대로 온전히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이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깨끗하고 거룩함을 가지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어디로 갈지 몰라서 방황하는 삶이 아니라 분명하게 가야할 곳확실한 삶의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이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살 때,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어집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참되게 살게하고, 우리의 인생이 낭비되는 삶이 아닌 의미 있게 사는가장 최선의 안내자로 우리에게 역사해 주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나온대로 행하기를 작정하고, 이 말씀에서 지시한 대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진리로의 삶을 통해 깨끗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삶의 도리, 믿는 자들의 삶의 표준이 무엇인지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이 헛되이, 엉뚱한 곳으로 사용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매뉴얼인 이 성경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매뉴얼 읽지 않고, 적당히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매뉴얼을 읽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많고 다양한 기능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매뉴얼 없이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인생 지침서를 주시는 그 매뉴얼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며,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과 교제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배운 만큼, 여러분이 주워들은 지식 따라 살지 말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그럴듯한 매뉴얼이 아닌 분명한 매뉴얼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날마다 깨끗해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진리에 순종함으로 깨끗함을 받을 때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게 된다 고 합니다.

        성경에서 신실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고대의 배우가 가면을 벗고 그의 배역 이면에 있는 실제 모습을 보여 주는 것과 비교해서 사용합니다. 배우가 가꾸어지지 않은 맨얼굴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화장으로 사람의 얼굴이 180도로 바뀌고, 꽁꽁 감출 수 있는데, 그 맨 얼굴을 보여 준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배우가 주어진 각본에 따라 절제된 행동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스럼없는 행동을 보여 주는 것, 빈틈을 보여 주는 것은 사실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감추지 않고 나타내 주는 삶이 사람들에게 더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믿는 자들이 가면을 쓰고, 감추인 모습으로 형제 자매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형제 자매에게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사람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이나, 댓가가 들어가서도 안되고,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서도 안되고,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인해서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이 사랑을 우리도 거저 주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정말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기도하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려고 할 때에도 최대한 배려를 하면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섬긴 것이 나한테 돌아오도록 계산하고 섬기거나, 베풀면 안됩니다. 섬김을 통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도록 하나님께만 아뢸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섬김을 통한, 형제 사랑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가식적인 사랑과 섬김은 상급이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 되어지는 사랑, 내 것 다 챙기고 남의 눈 의식해서 형식적으로 하는 사랑, 나중에 다 들통이 납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어도, 진실함으로, 속이지 않고, 적음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 지난주를 뜨겁게 달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터키 해안에서 발견된 세살된 시리아 난민 어린이 한명이 해안가에 엎드려져서 시체로 발견된 사진입니다. 이름은 아일란 쿠르디라는 어린아이의 사진입니다.

        소위 중동, 아프리카의 오랜 독재와 탄압으로 인해 소위 아랍의 봄이라는 운동들이 SNS를 통해 번진 일로 인해 많은 어려움들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중동,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피해를 당한 많은 시민들이 전쟁을 피해 난민으로 유럽지역으로 피난을 갑니다. 쿠르디의 가족도 피난을 가다가, 타고 가던 보트가 뒤집혀 이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는 이미 3년간의 내전으로 이미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하루 평균 6,000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떠돌고 있는 난민이 나라별로 확인하면 터키가 약 41만 명, 레바논이 약 80만 명, 요르단이 약 50만 명, 이집트 약 10만 명으로 나타나며 시리아 국내 난민도 400만 명에 이릅니다. 국내 실향민 중 46%가 아동이고 월평균 5,000명씩 죽고 끼니를 제때 먹지 못하는 사람만 400에 이릅니다. UN은 이 같은 추세라면 내년 시리아 난민은 400 만 명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리아 내전을 지켜보니, 강대국들은 이 시리아 내전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의 실리에 맞게 시리아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이 오랜 독재를 하던 정부 정권을 지지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아랍리그, 유럽연합, 미국 및 터키가 반정부세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반정부 세력을 지지하는 나라들은, 시리아 정부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에 참여하여 시리아의 관광 및 석유 판매고는 급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는 경제대로 어려워지고, 전쟁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죽은 세 살배기 쿠르디 같은 시리아 난민들 가운데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시리아는 사도 바울이 회심을 하게 되는 다메섹과 같은 초기 기독교 유적과 역사가 많은 지역인데, 이곳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세 살배기 쿠르디의 사진이 이렇게 크게 확산이 된 것은 최근 유럽연합이 이 난민을 골치 아픈 문제로 여기고, 이들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중동, 아프리카 지역은 모슬렘들이 많아서, 이들이 유럽에 대거 유입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지금 경제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이 이 난민들을 받아들이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자 바로 옆에서 생기는 이 일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 지난 4월에는 배를 타고 오던 난민 950명의 배가 뒤집혀서 거의 대부분이 죽었고, 올해에만 난민으로 피난길에 오르다가 죽은 사람이 2,643입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같은 동유럽 국가는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고, 난민을 거절하고, 난민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175km의 레이저 철조망까지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외면하고 살 수 없습니다.

        생사에 걸린 문제로 하루 하루를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저도 이번에 이 쿠르디의 사진을 보면서 시리아와 난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1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내전으로 주변국으로 흩어진 시리아 난민들 중 기독교로 회심하고 있는 난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이 당하는 고통을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사랑하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여 서로 사랑하라라는 본문을 영어성경 RSV 버전으로 보면 마음으로부터 깊게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마음에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득이 나올 것을 계산하고, 그 때 그 때마다 변하는 마음으로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함없이 모든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같이 대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잘해주고, 나에게 섭섭하게 하는 사람은 차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기에, 주님께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 멀리 내전으로 고통 받으며 하루, 하루를 겨우 겨우 넘기는 난민들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만나며 마주치며, 섞여서 살면서 생활하는 형제 자매들도 모두 우리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말씀 진리에 순종함으로 깨끗함을 받아, 거짓이 없이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진실한 형제자매 사랑이 일어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쫓아,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형제 자매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거듭난 삶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삶은 썩어 버릴 삶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삶인데, 왜냐하면, 이 거듭난 삶의 시작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벧전 1:23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벧전 1:24,25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풀과 꽃의 동일한 특징이 있습니다. 아름다울 때에는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어느 시점을 지나면 반드시 시들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진을 잘 찍지는 못하지만, 꽃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보지 못한 예쁜 꽃들을 보면 감탄합니다. 이름도 모르지만, 그 꽃의 생김새나 모양은 너무 너무 예쁩니다. 누가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감탄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들이 가지는 특징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모든 육체, 모든 영광은 바로 이와 같이 잠깐이라고 합니다. 풀과 같고, 꽃과 같이 마르고 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사라지거나, 시드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겪는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 줍니다.

        26:6-13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분개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왜 그랬냐고 흥분해서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라고 하면서, 온 천하에 다니면서 이 여인의 일을 말하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을 매우 값진 향유옥합을 사기 위한 인생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값진 것이지만, 그것을 나누는 사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한 번 뿐이 없는 이 아름다운 하나님이 주신 삶을 그냥 향유옥합을 사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우리가 향유옥합이 되어서 아름다운 향기를 나누어주고, 나타내야 합니다.

        () 제가 인도에서 1년차 일 때, 만난 가정이 있습니다.

        1년을 주재원으로 왔습니다. 한국에 계신 연로하신 부모님이 정말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가정이였는데, 분명한 신앙의 흐름과 고백이 있었지만, 예배를 등한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인도에 있는 동안 정말 인도 구석구석을 안 다닌 곳이 없이 다니셨습니다. 남인도, 북인도, 그리고 네팔, 스리랑카, 몰디브, 두바이, 터키까지 정말 페이스 북을 보면 너무 너무 많이 잘 다녔습니다. 저는 그 때 1년차라 잘 다니지 못할 때였는데 그 분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년이 금새 지나가고, 1년 동안 거의 교회를 안 나오고 귀국을 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 가정을 위해 생각이 남는 것은 Nothing"입니다. 아무것도 기억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목회자가 기도해 주고 싶어도 뭘 기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6-7개월 정도 짧게 교회 출석을 하다가 간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짧은 기간이였지만, 교회에 일찍 나와서 정리도 하고, 예배 준비를 하고, 찬양대에 나와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제일 더운 여름 시간, 많은 분들이 한국으로 들어갔었을 때, 교회 엠프와 스피커를 돌아보았습니다. 전문가도 아니였습니다. 처음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짧은 반년이지만, 목회자의 마음에서 축복 기도가 나옵니다. 그 분이 한국에 돌아가셔서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가정과 회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기억이 되고, 기도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나눌 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썩어져 가는 향유옥합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향유옥합을 나누는 삶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 이번에 세 살배기 쿠르드의 사진 한 장은 정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찍은 터키의 여기자는 그 사진을 찍을 때 무섭기도 하고, 충격에 빠졌지만, 이 사진을 통해 그 슬픔을 알리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사진 한 장 때문에 전세계가 난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동안 책임을 미루던 유럽 국가들이 난민 수용 정책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핸드폰에 수 많은 우리의 사진, 우리의 가족사진을 찍고 있지만, 그 수 많은 사진 가운데 과연 우리는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진들이 하나라도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지난 829일 강남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29살의 청년이 스크린 도어 오작동으로 전철에 치어 죽게 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찢겨나온 잔인한 상황이였지만, 이 상황보다 더 비참한 모습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그 사고 현장을 찍어서 자기의 SNS 에 그대로 올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 앞에서 죽고 있는데, 구조하기 보다는 자기 SNS 올리기에 치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도덕성과 마음의 상태를 읽게 해 주는 모습이였습니다.

        해안가에 밀려 시체로 떠밀려 온 세 살배기를 찍기 싫었지만, 울면서 사명을 가지고 찍은 여기자와는 정말 상반된 모습입니다.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인생도 잘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진리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뭔가 댓가를 위해 형제를 사랑하고...

        향유 옥합을 이웃과 나누는 삶이 아닌, 향유옥합을 사기 위해, 썩어져 버릴 것을 위해 우리의 귀중한 삶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거듭난 삶을 살며, 진실되게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되어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쓰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특별히 우리는 인도에 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로 보내 주셨습니까?

         

        (결론)

        똑같은 사진기이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결과가 나오듯이...,

        똑같은 기간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삶의 결과가 나오는 것과 같이, 오늘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들로 심겨진 썩어지지 않는 삶으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통해 디자인되고, 만들어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그림을 그려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중한 하루 하루와 삶을 만들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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