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 베드로전서 1:1-7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매년 이 시기쯤에 한권의 성경 부분을 집중해서 묵상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요나서, 2014년에는 아가서를 했었고, 올해에는 신약에서 베드로 전서를 중심으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집중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벧전 1:1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지역들입니다. 각 지역의 역사들을 연구해보면 정복과 전쟁을 반복하는 도시들로 기록이 되어집니다. 그러한 이 지역에 오늘 베드로 전서와 같은 서신이 전해지고, 주신 말씀들을 잘 되새기며, 말씀대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지역은 단순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지역으로 점점 발전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번 여름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마다 특색이 있고, 역사가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건강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이 있는 반면에, 건강하지 못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잘 알려진 도시들도 있었지만,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이 많았고,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방문을 한 도시들은 짧은 시간이였지만, 많은 변화를 가진 도시들도 있었습니다.
뉴욕에 플러싱이라는 지역을 방문했는데, 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뉴욕과는 정말 다른 도시입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로 소문난 뉴욕이 아니라 정말, 좀 허름하고, 가난한 동네 같은 한국의 약간 변두리 느낌이 많이 나는 지역이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도시에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 사람 남미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는 지역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원래는 코리안타운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지금은 중국이 다 밀고와서 상권을 장악한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아시안 타운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정도로 많은 아시안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구르가온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여러 수식어들이 붙습니다. “인도 같지 않다. 화려한 인도의 도시다, 인도의 발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도시다...등등” 이 있습니다. 한 번 구르가온 외곽을 30분 정도만 다녀와도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우리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도 지역마다 구별이 있는데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일 최고의 미국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뉴욕커라는 자부심이 상당합니다. 뉴욕의 플러싱과 같은 변두리에 살아도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합니다. 마치 한국에서 강남에 살아야 뭔가가 있어 보이듯이.....
구르가온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이 살기 좋은 도시, 점점 좋아지는 도시, 고급 아파트들이 많은 도시....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보면, 우리도 뉴욕커나 강남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대해서, 그냥 그런 수식어가 붙는 것에 그친다면, 우리는 뭔가를 하나 놓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역에 사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의 삶으로 말미암아, 이 도시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시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받은 이 도시들은 말씀을 받은 도시가 되어 후에 초대교회의 중요한 영적인 꽃을 피우는 도시가 됩니다. 우리도 구르가온에 삶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게 누리는 삶으로의 역사만 만들지 말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면서, 이 지역에 영적인 하나님의 향기를 피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이고, 정체성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피워서 이 도시가 하나님의 나라에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도록 우리가 마음을 모우고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사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디를 살던,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지는 동네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무 일 없이 잘 살다가 가는 곳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1:1의 뒷부분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이 도시들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흩어진 나그네...”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실 바울사도가 이방인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던 사도였다면,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이렇게 흩어지기 보다는 늘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나라가 없어져서 오랫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도, 그들은 항상 예루살렘 중심으로 모이려고 하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스라엘도 그런 이들의 역량으로 기원 후 70년에 이스라엘이 망한 후, 1948년 5월 14일에 다시 이스라엘에 모여서 나라를 건국하는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왠만해서는 흩어지지 않으려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을 한 시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에 대한 핍박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별과 이로 인해 오는 경제적, 사회적 구조적 불이익들은 그들이 흩어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수 없이 고향을 두고 흩어졌습니다. 고향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은 항상 불안합니다. 늘 살던 고향이 주던 여유와 안정감이 없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겪는 예상치 못할 일들은 항상 불안합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서 안정적으로 삶의 형태를 만들었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잘 지내도, 소수이고, 불안정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는 자주 사용되던 단어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어가 이 “나그네” 라는 단어에 숨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들이 이 땅을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사상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나그네”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정착하거나, 머무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을 가더라도 곧 떠나든지 움직여야 합니다.
이번에 저도 많은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기도 했고, 비행기를 갈아타야 되다보니, 북경과 동경에서도 하루씩을 자기도 해야 했고, 한국에서는 원래의 일정과 다르게 병원이라는 곳에 입원을 하기도 하고, 어머님이 계신 인천이라는 곳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위해 미국의 대학 기숙사에도 생활해보고, 친척집에서도 자기도 하고, 교우들의 집에서 자 보기도 했습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이 좀 낮설고 당황스럽습니다. 미국에서 컨퍼런스를 할 때에는 기숙사를 써야 되어서, 기숙사 원칙에 남녀가 따로 방을 써야 되어서 저희 부부가 따로 방을 써야 했습니다. 병원은 4인실인데, 제가 좋든 싫든 한국 아저씨들의 야구 사랑으로 하루에 4시간 이상은 야구를 봐야하고, 격투기를 2시간 이상 꼭 봐야하는 상황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낼만하면, 정한 시간이 되면,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의 일정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머물러버리면, 더 이상의 진척이 없습니다. 병원에서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좀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 공용 휠체어를 누가 좋은 것을 점유하느냐 등 미묘하지만 갈등이 있습니다.
공용 냉장고의 그 작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모습들, 특별히 최근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날카로워져서, 틈만 나면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병원에서 잠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병원에서 아주 오래 살 것처럼 하고, 사람들은 지내려고 합니다.
반면에 나그네임을 인식하고 떠나야 될 때를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은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곳이 불편하지만, 더 퇴원 후를 기대하기에 좀 불편한 것을 참습니다. 병원 밥이 맛이 없어도, 매끼마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도에서 수술을 했으면 매일 먹을 인도 음식이 아니라 늘 감사하며 그 병원 밥에 감동하며 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그네라는 생각, 우리는 곧 ‘떠난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목사고 선교사라는 것이 병원에 알려지니까 제가 환자이지만, 그래도 삶의 자세를 바꿔야 했습니다.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늘 음료수를 대접하고, 식사를 주시는 요리사 분께는 매끼마다 너무 맛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간호사들에게도 먹다 남은 음식을 주고 가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이 간호사들이 밤,낮이 뒤바뀌면서 고생을 하는데, 준비된 음식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피자를 특별 주문해서 드렸습니다. 병원장님이 제 수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저를 그 병원에 소개한 집사님의 형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과 함께 제 수술비와 입원비를 다 처리해 주시기로 했는데, 제가 그 마음과 섬김은 받고, 축복기도는 하겠다고 하고, 병원비는 제가 보험으로 처리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받을 것 다 받고, 나중에 따로 보험을 신청하면 저에게는 좋겠지만, 제가 담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잘 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여러번 드렸습니다.
병원에서 싸워서 자기의 권리를 누리고, 당당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찾아가는 환자분들이 많습니다. 매일 보험회사에서 와서 그러한 것을 알려주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얼굴을 보면 별로 기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런데 그것을 잘 못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자리를 떠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떠나야 될 땨 떠날 줄 알아야, 우리의 인생 진도가 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지금 내가 처하는 곳에서 예수의 향기를 피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 세상은 “나그네의 삶”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너무 집착하고 살고, 안주하면, 정말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 전서를 받는 성도와 같이 이 “흩어진 나그네” 라는 부름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삶을 살 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은 참 컸습니다. 같이 지낼때는 잘 몰랐는데, 한 번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되니 더 반가웠습니다. 특별히 오래된 사람들,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더 기뻤습니다.
이번에 뜻하지 않게 병원에 지내게 되는 일로 인해 정말 흩어졌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귀임한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 성도들도 만나게 되니 인도에서 만나는 기쁨과 다른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도 선교사님들도 많이 병원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없어서 잘 뵙지 못했던 분들을 이번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흩어졌던 분들을 만나니 그 기쁨이 더 컸습니다. 지나온 삶의 여정을 나누는데 한 분 한 분의 스토리가 너무나 귀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삶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들, 흩어졌던 동역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이 땅에서 정말 예수의 향기를 잘 퍼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면, 그 흩어진 나그네들을 다시 만날 때 너무 너무 반갑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진땀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만날 때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흩어진 우리를 도우시고, 흩어진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모우실 주님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삶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전서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마음으로 받아서, 우리도 잘 새겨야 합니다. 그때 성도들에게 주어진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이 말씀을 귀하게 받아들여서 이 베드로 전서에서 주신 신앙의 원칙과 성도의 삶을 잘 배워서,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잘 자라야합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베드로전서를 좀 많이 읽고,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나그네 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잘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벧전 1:2에 그 흩어진 성도를 다시 수식어를 사용해서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인의 정체성과 목적을 잘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우연으로, 아니면 운이 좋거나, 대충 때에 따라 적당하게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분명한 “미리 아심”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을 받는 존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치우치거나 죄에 빠지기 쉬운 상황들, 잘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 길에 순종하도록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기에 모두가 이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이라는 것은 죄에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죄사함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죄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택함을 받은 자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 정도로 우리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계획과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 정현식 - 이번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제가 반석교회라는 곳에서 중고등부를 섬길 때 만났던 친구가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이 되어서 저를 만났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중1 때였는데, 아무런 특색이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의 형은 교회 임원도 하고 열심을 내서 다녔는데, 사실 그 동생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니, 그 친구가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요즘 청년들 가운데 보기 드문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 최상민) 어떤 친구는 제가 고3때 만나서 진학지도를 해 주었고, 대학을 갔었고, 대학부 때 저와 열심히 사역을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찬양 사역도 같이 하고, 일본에 선교 사역도 같이가고, 정말 저와 많은 시간을 같이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하나님께 조금만 더 가까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 한발짝을 더 나아오지 못했던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15년 이상을 계속 방황을 합니다. 벌써 37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조금만 더 나아왔으면 정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뒤로하고, 조금씩 세상과 친해졌는데, 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달려들었는데, 싸움이 붙어서 경찰서에 가고, 오히려 상대방에 더 많이 다쳐서, 합의금을 물어주느라 빚지고, 빚을 갚기 위해 사채를 쓰고, 그로인해 인생 바닥까지 가보고, 무기력증에 걸렸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빚을 갚고, 헤어나오기까지 그 아름다운 청년의 시기가 다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려는 각오를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고생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끌어 오신 길이라고 고백을 하며, 새롭게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 정명철 목사님) 신학교 동기 목사님...신학교를 좀 늦게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교회들을 경험하고, 수원에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결국 실패를 하고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목회 자리를 찾았지만, 한참을 기다리면서 많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후회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참고 참고 또 참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경남 하동에 가서 농촌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는데, 교회에서의 사역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일 매일이 기적이고, 지금은 정말 너무나 행복하게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모든 것을 다 버틸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계속 받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전서 1:2의 말씀이 정말 진짜로 적용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그 택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회와 긍휼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시는 은혜의 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도 그 은혜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주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벧전 1:2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기를 원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가장 귀한 분께 인정받고, 그 분의 택하심을 받은 너무 너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들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에게 최고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하나님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2절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라면, 3절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①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분이십니다.(3절)
②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3절)
③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4절)
④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정의하고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정의한다는 자체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유한한 자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머리로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경험되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Q) 그럼 목사님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잘 읽고, 그 안에 기록된 말씀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특별한 기적이나 능력이 임해서 오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기다립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그 일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충분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우리의 인생이 분명한 방향을 가지게 되고, 분명하게 정해집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그냥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살게 될 때에만, 분명하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게 되고, 깊이 있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신앙도 깊어지고 믿음도 깊어지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인해 재해석되게 되어집니다. 우리는 이번에 베드로 전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펴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오늘 베드로 전서에 전체 주제가 되어지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될 때 어떤한 삶을 살게 될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깊게 다루는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벧전 1:6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당시의 여러 가지 시험은 잠깐 근심할 정도의 가볍고, 쉬운 내용들이 아닙니다.
히 11:36-38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따르는 참기 힘든 시련들이 다가오는 것을 듣게 된 베드로 사도, 실제로 많은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그 시기를 겪는 성도들에게 고난이라는 주제를 접근하면서, 다가가서 전해 준 내용이 바로 베드로 전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위로를 합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라고 하면서 당시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오지만 그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이유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이 이 베드로 전서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전서의 곳곳에는 여러 고난들이 다가 올 때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잘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가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우면 성도들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시기에 이 베드로 전서를 다시 묵상하며, 그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위기와 고난의 시기를 대비하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고난도 이 베드로 전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일이지만, 이 고난을 이겨낼 말씀을 가장 많이 주신 책이 바로 이 베드로 전서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하는 이유”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를 우리가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당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흩어진 나그네”로 부르며, 언젠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모일자들로 성도들을 불렀다는 사실과,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시기 일수록 문제에 집착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그리스도인 됨”을 더욱 확실히 하고, “나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서” 소망이 없고, 고난의 시기라는 이 위기의 시기를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된다” 고 이야기 하면서, 그 고난을 이겼을 때 우리 주님이 주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라는 이 소망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이 베드로 전서를 통해 우리에게 귀중한 은혜의 말씀이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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