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0일 “나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방법” 고린도 전서 13:4-7
요즘 인터넷에서는 우리의 실제 나이를 측정해보는 프로그램이 유행입니다. 10가지 정도의 질문을 하고, 거기에 따른 나이를 계산해 주는데, 그 질문들 가운데 “당신은 혼자 있을 때가 좋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을 때가 좋습니까?”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있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인도에서도 정말 한국 사람이 그리워서 그냥 한국 사람만 봐도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가하면, 한국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셔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특별히 ‘나’ 하고 성격이 비슷하거나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면 별 문제가 없는데,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괜히 부담스러운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들보다는 분명하게 여러분과 다르고, 여러분과 생각이 같지 않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차이를 알면 알수록,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다르구나!’를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 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기도하고, 말없이 봉사하고, 찬양도 조용한 곡들을 선호하시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뜨겁게 기도하고, 소리 지르면서 외치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고, 찬양도 박수를 치며 힘차게 찬양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삶도 분명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다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은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기대하고, 내가 나름대로 정해진 생각으로 상대방을 계산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렇겠구나! 교회에 다니니까 이렇겠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착해야 합니까? 양보해야 합니까? 겸손해야 합니까? 온유해야 합니까?
얼굴은 어떻습니까? 예뻐야 합니까? 아니면 예쁘지는 않아도 단정해야 합니까?
대화는 공손해야 합니까? 좀 욕을 썩으면 안 됩니까?
옷은 좀 잘 입어야 합니까?
혹시 이런 저런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분이 어디에 계시면 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북사협에서 진행한 TEE 세미나 강의중에서 교회 안에 여러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1. 방패를 들고 있는 사람이 보이십니까?
이 사람은 늘 자신을 방어합니다. 다른 교우들이 자신에게 오지 못하도록 항상 거리를 둡니다. 남의 이야기는 들어 주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결코 꺼내 놓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감춥니다. 자신의 속사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력, 사회적 직위, 학력 등의 배경으로 자신을 꽁꽁 감싸두어서 자신을 결코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이슈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교회에서 한 동안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자기 스스로 일을 해결하고 옵니다. 그리고 항상 철저하게 무장된 방어적인 모습으로 빈틈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2. 화살을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항상 상대방을 공격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를 만나게 되면 너무 곤혹스럽습니다. 남이 좀 잘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고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가 뭐를 잘못했으면 사과를 꼭 받아내야 속이 시원합니다. 율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의 실수를 발견하면, 그 때부터 얼굴이 활짝 펴집니다. 항상 화살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과녁을 찾는 사람입니다.
3. 등을 돌리며 반대방향으로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딴청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봐야 될 곳을 보지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뭘 이야기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광고를 두 번 세 번해도 못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힘을 빼놓아서 공동체에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뭔 일을 추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빼 놓고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자리는 꼭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체면 차려주려고 뭐를 부탁을 하려고 하면 계속 딴청을 피웁니다. 이 핑게 저 핑게를 만들어서 부탁 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공동체를 지치게 합니다.
4. 삐에로 같이 이것 저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 보이십니까?
이 사람은 산만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주목해야 될 것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해 달라고 합니다. 삑삑 거리는 장난감 나팔을 불기도 하고, 풍선을 가지고 놀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우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목해 주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리고 자기하고 마음에 맞지 않게 공동체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꼭 삼천포로 세게 만듭니다. 원래의 취지를 망가뜨려서 흐트러 놓습니다. 자기가 주목받고, 인정 받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해 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면 그 때 부터는 분노게이지가 올라갑니다. 이런류의 성도들은 남들이 잘 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새가족들이나 누군가 특별하게 주목을 받으면 그 때부터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류의 성도들은 새가족이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특별한 주목을 받으려고 애를 쓰다보니, 특별하고 엉뚱한 일을 많이 벌립니다. 그래서 수습하기 힘든 일일 많이 일어 납니다.
5.입을 침묵하면서 다리를 꼬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보이십니까?
이런 분들은 설교시간에 주로 보게 됩니다. 모습이 굉장히 평안해 보입니다. “다 안다...” 라는 표정입니다. “목사님 어디 한 번 이야기 해 보십시오....저는 다 압니다.” 라는 자세입니다. “저는 교회 다닌지 오래 돼서요. 왠만한건 다 들어 봤어요...”이런 분들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눈 감고 자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6. 책 위에 앉아서 소리를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시는 분은 뭘까요?
네 맞습니다. 이 분은 아는게 너무 많습니다. 만물박사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알지 않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확신 있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얼마나 숨어서 노력을 했겠습니까? 이런류의 사람들은 그냥 크게 소리나 지르면서 윽박지르는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요즘에 하도 이런 저런 정보들이 많이니까 이런 부류하고는 좀 다른데 비슷한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근자감”이라고 부릅니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상대방의 모든 경험과 근거들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나온 이런 분류의 사람은 근거도 분명히 가지고 나옵니다. 따지기를 좋아하고, 항의하기도 좋아합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에 세미나를 인도해 주신 목사님이 방문한 어디 교회는 교인들이 진짜 거의 다 박사들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연구원이나 박사들인데, 이 분들 가운데 발견한 것은 교회에서나 목사님 앞에서는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으로 부르다가, 교회 밖에만 나가거나 목사님이 안계시면 성도들끼리 만나도 다들 서로 박사라는 호칭을 한다고 합니다. 다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인데도 일반인들도 없는데 서로 박사라고 호칭합니다.
교우들 간에 만남은 교우들 간에 예절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호칭도 그렇고, 교인들의 모임에서는 해야 될 것과 아닌 것을 분별하는 것이 서로의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해 주는 서로간의 예의입니다.
너무 친한척하고 성도 간에 예의를 너무 벗어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합니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사적인 호칭이 좋지만, 교우들이 모인자리에서 반말이나 좀 듣기 불편한 호칭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무튼 이런류의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말로지지 않습니다. 논쟁이 많이 일어납니다. 잘난척하는 것에는 탁월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7. 자 일곱 번째 여인이 있습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옆에서 열변을 토하는 잘난척 하는 성도를 쳐다봅니다.
이런류의 성도는 정체성을 설명하기 쉽지 않아서 TEE 세미나 본부에서도 많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 여인은 어떤 스타일의 성도일까? 여러분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여인은 6번 성도의 부인입니다. 교회 나가는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관계로 나가기는 해야 하는데, 교회에 나가면, 잘난척 하는 남편 때문에 온갖 지탄을 다 받는 남편 옆에서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말도 잘 하지 못하고, 그냥 투명인간으로 교회를 다녀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류의 성도는 자기의 의견이 없습니다. 옆에서 너무 강하게 이야기를 하는 남편 때문에, 교회에 오래 머무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견을 괜히 꺼내 놓았다가 집에 가서 만물박사 남편과 논쟁이 계속 될 것을 알기에 체념을 했습니다.
8. 이 사람은 손을 뒤로하고, 입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뭐를 하려고 하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손도 의자를 꽉 잡고 스스로 늘 다짐을 합니다. “나는 절대로 아무것도 안할거야...그리고 아무 말도 안할 거야...!” 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뜨겁게 설교를 해서 마음이 움직여도 자기 스스로 입을 막고, 손을 묶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무 생각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다 판단하고, 생각을 다합니다. 그런데 입을 막는 것은 이 사람이 과거에 ‘폭탄’이였기 때문에 지금 뭔 말을 하면 여러 사람이 다치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거침없는 한마디로 인해 과거에 일어난 엄청난 일을 생각하고, 말을 절제하고 행동을 절제합니다.
과거에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봉사나 주님을 위해 결단을 하려고 하는데 일단은 이성적으로 몸과 마음과 입을 닫습니다. 자신을 꽁꽁 묶어 놓습니다.
9. 계속 다리를 떨거나 손을 떨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지금 속에는 뭔지 모르는 일로 불안한데, 겉으로는 멀쩡한 척 계속 다리를 떨고 있습니다. 이런류의 사람은 세상에서 저지른 일이 교회에서 발각이 될까봐 계속 불안해하는 사람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교인같이 살지 않다고 주일날에는 교인인척 해야 되니, 속과 겉이 다른 반응으로 자꾸 불안해하고, 그 증상으로 다리를 떤다든지 손을 떠는 행동을 합니다. 지금 밖에서 했던 행동들이 걸릴까봐 몹시 초조해 합니다. 지금 주변에 혹시 다리를 떨고 있는 분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0. 지금 이 여자 분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왠지 부담스러운 사람입니다. 경직이 되었습니다. 늘 긴장하고 떨고 있습니다. 불안해합니다. 사람들 눈빛도 잘 못 마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옆에 사람을 마주 보고 축복송을 부르라고 하면 이것처럼 부담스러운게 없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는 찬양인도자가 은혜를 받고 “2절하면서 앞에 사람을 축복하면서 찬양합시다”라고 하면 너무 힘들어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쑥쓰러움이 많아서 예배 전, 후로 사람을 만날까봐, 일부로 예배가 시작하면 들어옵니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기전에 나갑니다. 소심한 성격이 있어서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말 주변이 없어서, 누가 말을 붙일까봐 늘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에 왔는데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게 너무나 힘이 듭니다.
11. 자 이제 마지막인데 이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날카로운 발톱도 있는 것 같고, 뒤에 꼬리도 있는 것 같은데, 안경을 썼습니다. 남에게 자신의 눈은 보여 주기 싫었나 봅니다. 그런데 얼굴은 올빼미 같은데 아주 덩치가 좋아보입니다. 이 캐릭터는 뭘까요?
네...사람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교인이라고 이야기를 하기 민망할 정도로 교인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교인의 모습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짐승 같다고 하겠습니까? 언젠가 난폭운전에 대한 광고가 있었는데, 난폭운전을 한 차에서 문이 열리고, 개가 한 마리 나왔었습니다. 요즘에는 하도 세상이 시끄럽고 살기 어려우니까 이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교도 되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꼬리가 있어서 언제든지 책임질 일이 생기면 날아가 버립니다. 내뺍니다.
참 재미있게 묘사를 했지만, 씁쓸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지쳐서 교회에 왔는데, 그리고 뭔가를 기대하고 교회를 왔는데, 교회에서 오늘 이 그림처럼 묘사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까 많이들 시험에 듭니다. 기대가 깨어지니까 세상에서 경험한 것보다 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 모든 사람을 우리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흠이 많고 피하고 싶은 캐릭터들이 많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질을 따지지 않고, 이 모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심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직접 겪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설명한 그림은 같이 있으면 불편한 사람들이지,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신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서 마주치십니다.
자신을 팔아버리는 제자, 자신을 두고 도망가는 제자, 자신을 메시야라고 열광했던 백성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을 직접 몸으로 겪으셨고, 자신을 때리고 상하게 하고, 자신을 조롱하는 인간들을 직접 다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앞서서 이야기한 사람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다 겪으셨습니다.
특별히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과 같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같이 힘을 모아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철저히 계산적인 사람들의 숱한 모함과 치사한 모든 것을 예수님은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일이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거나,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아시고, 그들이 스스로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도록 주님은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 전서의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깨달아 알았습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잘 나가던 종교지도자의 제자였던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정말 엉망이였던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가두고, 핍박하던 자신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자신 때문에 순교를 당하고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교회로 들어오기에는 너무나도 자격이 미달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사랑과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주신 그 큰 사랑을 깨닫게 되고,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을 얻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감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회 공동체에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핵심은 정말 보잘 것 없고, 자격없는 자신마저도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바울 자신도 감히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이렇게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자신이 직접 경험했기에 자기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빗대어서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바울의 마음으로 읽어 보기 원합니다.
① “사랑은 오래 참고 .....” - 핍박자 바울을 포기하지 않고 참아 주신 하나님, 심판을 당해서 없어져도 모자랄 자신을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하나씩 고소해서 가정을 완전히 박살낸 바울을 주님은 지켜 보시고, 기다려 주시고, 자신에게도 회심의 기회를 주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을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②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종교적 열심, 그리고 그의 가문과 배경, 그리고 학문적인 지성, 그리고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던 소위 미래가 촉망 받던 유대인중에 유대인이였던 바울이지만, 하늘 권세를 모두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박해와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니, 이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로 온유했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권세를 가지신 것을 자랑하지 않으셨고, 능력과 권세가 있다고 무례히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늘 섬김의 자리에서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이렇게 사랑이 많아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이 정말 철없고, 매너없고, 이기적이고, 부족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기준에서 이 사랑장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한 말씀에도,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진정한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참으시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자격을 가진 사람도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사랑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우리 주님은 자격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무한한 사랑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도 문제고, 저 사람도 문제라고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주님은 문제가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문제가 없는 이 사람을 위해서도 사랑을 제한하지 않으시고, 각각에게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시고, 각자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우리 각각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고 저렇다고 정죄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고, 포기 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에 대해서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견디십니다.
(적용)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고, 참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바울을 참아 주시고, 우리를 참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참아주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아까 설명 드린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천사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포기해도 주님은 절대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 뭐 좀 가격이 되고, 인품이 되어서 성경 인물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인생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시고, 새롭게 되기까지 오늘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과 같이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자기 입장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남을 무참하게 죽이는 세상 사람들을,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그런게 우리의 인생이고, 그로인해 서록 복수하고, 속이고, 험담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그로인해 우리에게 가득 찬 죄악 세상의 흔적을 보시고, 우리 주님은 다시 한 번 그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 참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에서,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좀 좋아보여도 좀 지나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온 사랑의 삶을,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각각의 모습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서, 부족한 성품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말씀으로 자신을 죽이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람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원래 그렇게 악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실천되도록 그 말씀을 붙들고, 우리도 우리에게 만나게 해 주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무례히 행치 않고, 견디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셨고,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을 위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정신을 잊지 않고 따르고 지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서, 사람들은 부족하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되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때때로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기대가 많은 실망을 주기도 하고, 이것으로 인해 속상해하고 분하게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한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 생각이 다른 사람들 모두를 우리 주님은 자격제한을 두지 않고,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맘 상해하고, 실망하지 말고,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 사랑으로 참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주님이 주시는 긍휼과 자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서, 그 사랑으로 내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우리 교회안에 성도들에게 다가가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참고, 기다릴줄 알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지도록 우리를 주안에서 묶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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