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2 눅 1:46-56 기다림의 신앙

      날짜 : 2014. 01. 23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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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22 1:46-56 기다림의 신앙

         

        이문동에 살 때 제 이웃이셨던 할머님이 계십니다. 동네가 여러 사정이 있어서 집을 팔고 모두 이사를 가는 시점이었고, 이사를 가면 집값을 많이 받고 팔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주변의 집들이 다 이사를 가는데, 그 집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집을 알박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했습니다. 그 집만 없으면 좋은 시설이 들어 올 텐데....비싸게 받으려고 알박이를 하고...

        그런데 이웃이기에 좀 더 가까이에서 사연을 알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님 남편이 베트남전에서 행방불명이 되셔서, 남편이 돌아오면 집을 찾을 수 있도록 이사를 가지 않고, 40년이 넘게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매년 이 맘 때면 한국의 한 기도원에서 박스가 우편물로 옵니다. 해외에 있는 선교사님들에게 사랑의 선물박스 위문품인데, 작년하고, 재작년에는 받았는데, 올해는 계속 오지 않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신청을 해야 준다고 했는데, 올해에는 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포기를 하기는 했는데, 그런데도 괜히 아쉬움이 생깁니다. 우체국에 한 번 가볼까, 아니면 한국에 전화를 해서 이번에 안보내셨냐고, 묻고도 싶어 집니다.괜히 기다려집니다.

        인도에 있으니까 간혹 한국에서 가족이나 친지가 오면 기다려집니다.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뭐하나라도 들고 와서 위로해주니까, 괜히 기다려집니다. 생일날이나 명절이나 특별한 기념일이 되면 괜히 뭔가가 기다려집니다. 뭔가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삶에 큰 활력을 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뭐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뭐가 제일 기다려집니까?

        (인도를 떠날 날이 기다려집니까?)

        성탄절을 앞 둔 전 넷째주를 우리가 대강절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대강절은 (待降節, 기다릴 대, 내릴 강, 마디절)도착하다, 오다라는 라틴어 어드벤트(advent)"에서 유래된 내용입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의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지켰습니다.

        처음 초기의 믿음의 선배들은 주후 1,000년까지는 초림하신 예수님, 다시 말하면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셨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 이 날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12세기부터는 더 넓은 뜻으로 적용해서, 부활하신 후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다림까지 표현된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단순한 누구누구의 탄신일을 지키는 다른 종교 창시자의 모습과는 좀 더 구별되고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하고 오실 주님까지 기다리는 믿음의 시간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큰 흐름도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기다림 가운데 오신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의 시간이고,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앙은 이 기다림의 신앙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1절을 보면 열처녀의 비유를 들면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다고 비유를 했습니다. 멀리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지 모릅니다. 정말 비참한 것은 기다려 줄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다면, 그처럼 비참한 삶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이나, 고향을 가면 힘이 나는 이유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한국방문 때에는 일정을 대부분 부산에서 보내야 되었기에 부모님들과 같이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항상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풍성한 반찬은 아니였지만, 시간이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자식을 위해 항상 기다려 주시고, 챙겨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많은 분들은 인도에 언제 돌아가느냐를 묻지만, 유일하게 언제 다시 한국에 오냐를 묻는 분은 부모님들 밖에 안계셨습니다.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기에 나의 존재가 확인이 되고, 내가 살아도 제대로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가장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20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내용을 가지고 그린 성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문을 차분하게 두드리고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들은 이야기는 아프리카에서는 이 그림이 예수님이 그냥 조용히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라, 문이 부서지도록 두드리시는 장면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셔기에 이런 그림까지 나올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문을 어떻게 두드리실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분히 인격적으로 두드리시고, 우리가 반응하기를 기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 주님이 기다려도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지성으로, 수 많은 방법을 써도, 문을 열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수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도 해 주셨고, 그 외에도 엄청난 기적을 보여 주셨어도, 기다리시는 주님을 그냥 힐긋 쳐다보고 말았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반응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포기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방법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으로 사람으로 몸에서 태어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우리를 목 놓아 기다리시는 그 주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결국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기다려도 반응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이제는 지치실만한데도, 주님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땅에서 제자들을 통해서 아직도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기다리시는 주님이 주시려는 그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다고, 전적인 용서와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사하시는 분들이 셈법으로 아무리 계산을 해도 이거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밑지는 장사입니다. 남지 않는 장사입니다. 사람이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화를 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존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또 기다려 주십니다. 그렇게 기다려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아는척도 안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해서 기다리십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 보좌 가운데 기다리시던 그 기다리심을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기다려 주시기 위한 그 오심, 이 성탄절은 바로 그 사랑의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겨진 우리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대로, 마리아에게만 일어났던 그 특별한 일이 아니라, 비록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그 일이 가지는 역사적, 상징적인 의미는 우리 모든 인류를 기다리시다가, 우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기다리시기 위한 특별한 사랑으로 다가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어떤 특별한 인물이 태어난 날이라고 그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이 가지는 그 엄청난 메시지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를 위해 이 날에 오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은 매우 축복된 날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가야하는 우리의 인생이 새로운 삶으로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 표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날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그러기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인데, 얼마나 소중합니까?

        오늘 이 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된 마리아는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한다는 것,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 전에 남편과 잠자리를 들기 전에 이렇게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에 부담은 있었고, 두려움은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 인류의 가장 큰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만난다는 그 기쁨을 제대로 알게 되었기에 그 입술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구세주가 자기를 통해서 나온다는 그 기쁨에 마리아는 찬양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상황은 자칫하면, 사회적으로 추방을 당할 수도 있고, 약혼한 남편에게 파혼을 당할 수도 있고, 이웃들에게는 부정한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게 될 수도 있었지만, 마리아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역사하심을 깨닫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염려의 시간이 아니라, 그 주님의 나심을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이 기다리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의 찬양을 들어보면, 억지로 아름다운 말을 넣어서 꾸며서, 듣기 좋게 만든 찬양시가 아닙니다. 어투가 서투를 지라고, 그 마음 가운데 있는 진심으로 그는 노래합니다. 1:47-55을 보면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 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라고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기다리시다가, 이 방법으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 그 분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자신과 같은 비천한 자에게도 그 은혜가 임해서, 그 놀라운 사역에 동참한다는 그 사실에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처럼, 우리를 위해 기다리셨던, 그 하나님...기다리시다가 우리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마리아에게 오신 주님의 방법과 같은 이 특별한 방법을 알고, 주님을 찬양한 마리아처럼, 오늘 우리 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시시는 주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그 한사람, 한사람이 다 주님을 온전히 만나도록, 그 사람이 돌아오기까지 엄청나게 기다리시고, 사랑하시며, 그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리아처럼 주님께 찬양을 가지고 나아와야 할 때입니다. 나를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신 하나님을 위해, 그 분께 찬양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어떻게 그 하나님을 사랑을 날마다 깨닫고 계십니까?

        이번 성탄은 그 기다리시는 하나님, 기다리시다가 우리에게 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그 분을 찬양하는 마리아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와 다른 내용입니까?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은 자기 같이 비천한 자를 주님이 이 땅에 통로로 오시는데 사용했다는 찬양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외롭고, 힘들 때 자신을 만나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분은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분은 큰 병에서 고통을 받을 때 치료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찬양하게 되어집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른 채, 그냥 공휴일 달력 한 장 뜯어버리고, 넘기는 성탄절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고, 그 분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이 땅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면서 찬양을 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냥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유있는 찬양을 하기 원합니다.

        인도에서 찬양할 이유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인도에서 우리의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그 분을 노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이번 성탄에는 왜 그 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삶을 위해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아가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노래를 못하고, 악보를 못 보아도 좋습니다. 서툴지만, 여러분의 고백이 있는 찬양이 이번 성탄절에 마리아의 찬양처럼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곡조가 없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그 분을 인정하고,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가장 최선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등과 같은 고백도 좋습니다. 그 분을 위해 노래하는, 그분을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 그리고 성탄절을 계기로 더욱 주님과 가까워지는 주님을 노래하는 찬양의 고백이 이어지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신 주님...

        오늘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사시고, 우리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주셨던 그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을 잊지말고 특히 이번 성탄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다리시고, 참으셨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신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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