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일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 요 12:44-50
어린 아이들끼리 가끔 말장난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재미가 있습니다. 아직 표현들이 서툴러서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자세히 들어보면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다툼이 시작되면 승자가 나와야 합니다. 어디를 가나 목소리 큰 아이들이 많이 이깁니다. 그런데 이 목소리 큰 아이들이 꼼짝 못하게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편의 아이가 이야기를 하다가 계속 몰리고, 몰리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내가 맞다니까!, 진짜라니까? 우리 아빠가 그랬다니까!” 라고 이야기를 하면 상황이 급반전이 됩니다. 왜 아이가 이야기 한 것은 효력이 없고, 아이의 말이 아니라 아빠의 말이라고 해야 효력이 생길까요?
학원이나 대학교에서 특강 광고가 많이 소개가 되어집니다. 그런데 좀 더 인기 있고, 사람이 몰리는 강의는 “저자 직강”이라는 광고 문구에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더 잘 가르치고, 강의 전달력이 뛰어나도, 왠지 사람들은 저자에 더 많이 비중을 두게 됩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저자가 가르쳐야, 가장 정확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한 선교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선교사님이 고아원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아원에 붙어 있는 글들이 “먹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 일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이라고 써 놓고, 먹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짐승과 똑같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위해서 먹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 구절이 밑에 쓰여 있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어디서 많이 듣기는 들었는데, 성경보다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더 많이 들어 본 것 같습니다. 바로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이 자주 쓰던 표현으로 가나안 농군학교가 소개가 될 때 마다 이 성경 구절이 소개되어서 우리 귀에 익숙한 내용입니다. 성경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것을 철학으로 삼은 것입니다.
귀한 일이고, 김용기 장로님의 가나안 농군학교의 철학과 비전을 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너무나 귀중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깊은 이해없이, 앞,뒤의 상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그냥 우리가 필요하니까 이것저것을 갖다 붙여서 자신을 지지하는 도구로 삼는다든지, 방어하는 방패로 삼는 것은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가령 이런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 인물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의 예를 들게 됩니다. 다윗도 들고, 다니엘도 들고, 여자 분들은 에스더도 들고, 마리아도 들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장점을 한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우리도 다윗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살아야 합니다.’ 라고 결론을 맺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말이 틀리지는 않은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빼먹게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성경에 소개한 이유는 다윗의 변함없는 성품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용기로 나아왔던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말을 “다윗의 용기”라고 기록하고, ‘우리도 다윗처럼 살아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습니까? 다윗이 평소에 물맷돌을 던졌던 것이 골리앗을 넘어뜨렸듯이, 우리도 평소에 잘하는 기술하나는 꾸준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자기 기술을 위해 15분씩 투자를 해서 기술을 향상시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있는 그 어떤 골리앗도 넘어 뜨릴수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 앞에 모든 골리앗이 무너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던지는대로 모든 것이 다 명중이 될 것입니다.......
뭔가 허전하지 않으세요....
서구 선교사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완전히 쑥대밭이 된 일본에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 갔습니다. 선교사들은 일본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영어”라는 무기를 들고 들어 갔습니다. YMCA,YWCA라는 기독교 단체로 일본에 뿌리는 내렸지만, 아쉽게도 일본의 이 단체들은 영어학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데이밍이라는 경영학자가 들어 갔습니다. 패전 후 하루 하루 살기 급급한 일본인에게 이 데이밍은 품질 경영이라는 경영철학을 전해 주었는데, 사실 이 경영 철학의 기초는 기독교의 “섬김” 정신에서 나온 것이였습니다. 이 섬김을 경영과 잘 연결하여, 당시 일본도 다른 나라의 제품들을 베끼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 베끼기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세계 시장에 주목을 받으며 오늘의 일본을 만든 그 밑바탕은 기독교 정신을 가져가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의 공통점은 뭔가가 약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족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비껴갔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간 비껴나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며, 중요한 핵심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요나서를 가지고 오랫동안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나서를 소개하면서 복선을 늘 말씀 드렸습니다. 요나서를 잘못 해석하면 인간 요나의 영웅담으로 만들어집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 니느웨의 십이만여명의 목숨을 구한 사람 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 그 모든 자연환경을 다루시는 하나님, 엉뚱하게 자기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요나를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가 진정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쓰러 뜨린 돌팔매 기술을 가진 용감한 청년 다윗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목동 임에도 늘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 사울의 압제를 피해서 가장 비참한 시간을 가졌을 때에도 늘 함께 하신 하나님, 왕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함께 하신 하나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며, 그 남편을 죽게 하는 천인공로 할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는 그를 다시 받아 주시고, 죄를 뉘우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야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한 어떤 필요한 가치나 개념이나 철학을 뽑아서 그것을 가훈이나 교훈 삼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 이 성경의 권위는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그 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간혹 지혜를 얻기 위해 잠언을 읽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시편을 잃는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엄밀하게 이야기를 드리면 약간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잠언의 중요한 메시지도, 이 땅의 참된 지혜자가 누구이시며, 그 분의 지혜가 어떠한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이고, 시편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백을 담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주 미묘한 차이를 두면서 그 본질에서 약간씩 벗어나서 우리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인용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경영학자들은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과 기업운영”, “예수님의 제자화 사역을 통해 본 기업의 직원 관리” 등으로 약간씩 방향을 틀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접근 자체를 기독교적으로 하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거의 근접한 지점까지 와서 핵심을 놓쳐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오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잘 믿고, 따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이 요한복음 12장의 시작은 우리가 소위 종려 주일에 묵상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동안 소문대로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고,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그래서 그 능력으로 이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그 기다리던 왕,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인줄 알고,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에는 엄청난 환호를 했었습니다.
요 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와 능력의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기대가 깨어지셨습니다. 당시 로마의 분위기는 장군이 입성할 때 횐 백마를 타고 들어오는데, 흑마도 아니고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기대하고 잘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요 12:35,36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요 12:37에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믿기는 믿었지만,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믿고는 싶은데, 사회적 분위기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냥 속으로만 믿은 것입니다. 요 12:42,43을 보면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뜨뜨미지근하게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2:44-50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답답해 하시는 심정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왜 내 말을 믿지 않느냐? 내 말은 내가 지어서 그냥 듣기 좋으라고, 내가 너희들에게 점수 따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내 말의 권위는 나와 하나이신 아버지로부터”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 12:44,45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요 12:49,50에도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가르침과 생애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 모든 권위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되어지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되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좀 더 그럴듯하게, 자연스럽게, 각색하거나,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근원, 근본, 주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1순위, 예수님이 2순위라고도 말씀하시지 않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 신적인 권위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 오늘 주신 말씀의 권위를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교훈이나, 기대하는 말만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하고, 지금 말씀 하신 그 분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를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러한 부분들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들고, 인정이 메마른 시대에는 그냥 위로의 말씀만 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계속 묵상하며, 예수님이 다니시면서 주로 하셨던 일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기도 하시고, 예수님도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과 만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말씀 하셨던 내용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전도에 관한 말씀이셨습니다.
좀 더 고상한 아이템으로, 좀 더 안정된 다른 개념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면, 우리도 좀 폼이 날 텐데, 계속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상당한 부분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우리도 다시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그렇게 활동하셨는지를.....
이것도 역시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49,50의 내용과도 맞물립니다.
이러한 행동도 예수님이 자의적으로, 충동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 분으로부터 지시를 받으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유추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에서 비껴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접근하여, 그 분의 음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 우리가 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엄마 개구리의 말에 반대로 살았던 청개구리....그런데 그 아들 개구리가 걱정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엄마 개구리가 수를 두고 이야기를 했는데, 아들 개구리가 또 그 때는 엉뚱하게 엄마 개구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 귀를 잘 귀울여야 합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씀 골라서, 내가 그것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고, 철학으로 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이 곧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고, 아버지 하나님이 곧 그 분이시라는 이 영적인 권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은 그냥 듣기 좋은 강의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치료제 정도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의 권위를 기억하며, 그 분의 존재를 분명히 알아가며,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생명이고, 그 분의 말씀은 우리가 가장 깊게 깨달아 알아야 하는 최고의 말씀입니다.
일본 후쿠오카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70세가 다 되신 안경달 목사님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지역에서는 유지셨습니다. 그런데 60세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어머님이 연세가 100세셨습니다. 그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100세를 살아 보았는데, 정말 가장 잘 한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었고,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하나님을 이웃들에게 잘 전하지 못한 것이 인생에서 제일 후회스럽구나, 특별히 일본에게 오랫동안 피해를 입어서 그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들을 품지 못하고, 죽는구나, 니가 나 대신에 가서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주지 않을래” 라고 유언을 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 안경달 목사님은 그 때부터 인생의 방향을 전하고, 어머님이 하신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나이하고 선교단체 하고는 어울리지 않지만,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로 일본 후쿠오카 지역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해 오고 계십니다. 일본 후쿠오카 지역에 일본 교회 목사님들이 이 분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모릅니다.
연세가 100세가 되어, 죽기 직전에 남긴 말임에도, 그 어머니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여 살고 계시는 목사님을 뵈면 늘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말씀이 잘못 되었다고, 어머님이 나를 고생에 몰라 넣으셨다고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여고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위풍은 없고, 그냥 노란색 선교단체 티셔츠에 청바지와 샌달을 신고, 선교팀이 두고간 김과 멸치와 고추장을 짜서 식사를 하시고, 팀을 위해 6시간씩 운전대를 잡고 팀을 섬기시는 모습은, 70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 속에서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미 주님께서 여러차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나를 요 12:36에는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 요12:44,45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그분 안에 살도록 이미 여러차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구절 몇 개 알고, 그냥 집에 액자로 걸어 놓을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그 분의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알아, 살아가는 삶과 그렇지 않고, 일부만 이해하고 살아가거나,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좋은 강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강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꼭 따라가야 하는 생명의 길을 말씀 하신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주시고,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참 소망이시고, 우리에게 참 복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무지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알려하지 않고, 내가 알고 싶은 부분만 알려하고, 주님이 주시는 음성을 다 듣지 않고, 나의 계산된 생각으로 주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이해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강의로 생각하고, 들으면 그냥 좋다는 말씀 정도로만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놓쳤던 주님의 말씀과 권위를 이 시간 다시 한 번 알게 하셔서,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의 삶을 통해 주셨던 그 교훈을 기억하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이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시고, 이를 통해 주님을 온전히 붙잡는 우리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