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0 고린도전서 12:14-27 약한 자를 돌보게 하시는 하나님

      날짜 : 2014. 01. 23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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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0일 고린도전서 12:14-27 약한 자를 돌보게 하시는 하나님

        이제 좀 인도에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난주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6월 청소년부 마날리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서 느낀 것이 교회 행사는 항상 사전에 답사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전에 답사를 갔더라면, 미리 준비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대비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인도 여행 중에 손꼽아 쳐주는 것이 자이살메르 사막 여행입니다. 사막에서 낙타도 타고, 사막의 성읍도 돌고, 사막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자는 일인데, 청소년들에게 좋은 경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먼저 답사차 가기 위해 일정을 잡았습니다. 미리 사전에 지역 공부도 하고, 틈틈이 정보도 공부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날 올드델리 기차역에 도착을 했는데, 아쉽게도 10분 늦게 도착을 했고, 이미 기차가 떠나버렸습니다. 정말 10분 늦었는데, 정각에 기차가 떠나버렸습니다. 34일의 일정이 순식간에 날라 갔고, 재정도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 때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인도가 무섭습니다.

        34일을 지나면서, 늘 마음에 비교를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쯤 도착해서 낙타타고 있어야 할텐데....지금쯤 사막에서 자고 있겠지....., 그러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을 비교하면서, 사막에서의 시간과 비교하면서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놓쳐버린 기차로 인해 새롭게 주어진 34일 동안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도 만나게 되었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더 안정이 되었습니다. 아마 사막을 다녀왔다면, 무지하게 피곤해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때로는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10분만 일찍 기차를 탔어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10분 늦게 가서 기차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놓친 기차들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는 간혹 이처럼 우리가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놓쳐버린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한 가정과 식사를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재작년만해도 탄탄한 기업이었는데, 그리고 법인장으로 인도에서 자신의 꿈과 비전으로 회사를 키우려던 알찬 계획이 있었는데, 갑자기 인도 경제가 어려워서 회사를 철수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 가던 기차를 바꿔 타야 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가야할 목적지가 아닌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마음이 참 어렵습니다.

        또 한 선교사님과도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도에서 적응할만하고, 언어도 익혀서 이제 사역을 막 시작했는데, 갑자기 병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냥 치유해서 낫게 되는 병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질병이기에, 더 이상 인도에 있을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인도를 철수하게 된 선교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저도 그 선교사님의 병명을 듣고,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인도에 있기에는 어려운 건강상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의 경우는 기차를 타고 싶은데, 기차를 탈 조건이 안 되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지금 다 각자의 목표를 위한 기차를 타고 있든지, 아니면, 새로운 기차를 타려고 하든지, 아니면, 목적지에 가까이 와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이 기차로 더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현재, 인도라는 기차에 같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계획한대로,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도 있지만, 중간에 부득이하게 내려야 될 수도 있고, 저처럼 타고 싶었지만,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정된 코스를, 목적지를 잘 가고 있지만, 가다보면,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중도하차를 하든지, 갈아타야 하는 우리의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함께 탄 이 기차에는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우리들의 이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편안하게 자기의 목적지를 잘 가는 사람도 있지만,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이번에 기차를 놓치기 전에 좀 더 철저하게 이야기를 해 주어서, 그 기차역 주변이 많은 교통체증이 있다는 이야기만 했어도, 그리고 복잡한 기차역에서 정확하게 타는 법만 누군가가 알려주었어도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혼란스럽고, 힘들고, 낮설어 있을 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운전해주는 기사도 그 기차역에 처음 가 보아서, 현지인인데도 그곳에서 헤메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인생에서 이렇게 길을 잃고, 헤메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씩 도와주면, 정말 큰 힘을 얻고,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될 사람인데, 그 기회를 서로 놓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비유를 우리의 몸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절부터는 우리의 몸은 한 지체뿐만이 아니라 여럿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능이 다 다르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다 기능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 12:15-17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각 지체의 배치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전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라고 합니다. 각각의 역할과 기능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 있다고 했고, 그 정해진 기능을 살게 될 때, 온전하게 전체로서의 몸의 기능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지체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무시합니다. 나는 필요하고, 너는 필요없고,....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합니다. 고전 12:21을 보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라고 이야기를 하고, 무용론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너무나 많이 진행이 됩니다. 좀 싹싹하고, 밥값을 하는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으면서 문제나 일으키고, 밥값도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고, 무시를 하기 시작하면서, 계층을 나눠버리게 되는 일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직장사회나 사회생활은 이 부분이 더욱 철저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철처히 따돌리고, 무시하는 사회가 이 세상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내가 좀 가진 것이 있고, 남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당신은 쓸데가 있는 사람이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관계를 맺고, 뭔가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어서, 나에게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이 되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나아지면, 그 동안 쓸모 있었지만, 이제 필요 없다고 버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대해서, 우리만의 영적인 기준을 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에 엘리트만 남고, 잘 나가는 사람만 남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을 때, 항상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쓸모가 있냐, 없냐에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무용지물 같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에도, 늘 우리 곁에 계셔 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아무 곳도 기댈 곳이 없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고 하시고,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항상 보호해 주시고, 별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와 물을 다 흘리고 돌아가실 때, 뭔가 계산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일당 얼마씩 받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 뭐를 바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계산도 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들과 함께 계셔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에게 행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하여, 필요에 따라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힘들어하고, 약하고, 쓸모없어 보이고,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금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어주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제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바지에다가 대변을 보고, 그냥 계속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못된 정용구가 선생님께 일렀습니다. 반 아이들이 너무나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제가 반 아이들을 생각해서, 제 앞에 아이를 선생님께 일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바지가 젖어 있는 모습을 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 그 친구한테 미안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이후로 한 동안 똥사배기라고 놀림을 당하였습니다. 똥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 그 아이에게 시선이 갔습니다. 제가 나중에 자녀를 양육해 보니,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은 배변 훈련이 잘 안되어서, 공공 장소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되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를 좀 참아주고, 덮어주거나, 다른 모습으로 도와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날 배탈이 났던지, 속이 안 좋았을텐데....지금은 누군지도, 모르고, 저도 그 때 철이 없어서 그랬지만, 너무나 미안했던 일이였습니다.

        동안교회에 있을 때 시무장로님들 전체와 함께 캄보디아로 비전트립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녁 시간에 우리를 인도하시던 캄보디아 선교사님이 저희들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어하십니까? 그 때 장로님들이 하나둘씩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어를 잘 하는 선교사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버티는 선교사요!”,“현지인들처럼 먹고 자고 지낼 수 있는 선교사요!”,“선교 경험이 많은 선교사요!”등등의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한참을 듣던 선교사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이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님들에 대해서 가진 생각입니다. 소위 엘리트 선교사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캄보디아에서 9년을 사역을 하다보니, 선교사가 지치고, 언어도 잘 못하고, 사역도 잘 안되고, 선교지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선교사는 이 때, 같이 이야기 들어 주고, 울어 줄 한국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모두 숙연해 지셨습니다.

        지난번에 전사협 대회 때 인도에서 사역하시는 한인교회 목사님들을 모시고, 선교사님들이 질문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교회가 어떤 선교사를 후원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목사님은 선교를 잘하는 선교사님을 돕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을 경험을 해 보았지만,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계속 후원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또 한 분은 잘 아는 선교사님을 후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지내보니, 잘 모르는 선교사님들과는 자꾸 방향이 틀리고, 기대치가 달라서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유를 이야기 했었습니다.”

        저는 뭐라고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선교사 자녀 파트의 강사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게 묻는다면, “저는 힘들고, 어려운 선교사님 도울 것입니다.사역을 잘 못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교사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잘하는 선교사님은 능력이 많아서 후원하시는 분들이 아무튼 모입니다. 그리고 잘 아는 선교사님은 관계는 좋은데, 관계와 사역이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제가 기차를 놓친 것 같이, 지금 힘들어하고, 놓친 기차를 보고 주저 않아 있는 분들에게 같이 격려해 주고, 같이 아파해 주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2:22,23을 보면, 좀 덜 귀히 여겨지고, 부족해 보이는 것들을 더 귀히 여기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갈 때, 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함께 담당해 주고 섬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은 약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더욱 요긴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원칙이 교회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그래서 잘하는 사람만 남기는 학원의 우등생반이 아니라, 지금 좀 약해 보이고, 좀 별로인 것 같은 사람도 같이 존재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천국에서의 모습이 사자와 양이 같이 뛰노는 곳이라고 묘사를 해 주었습니다. 좀 잘나가는 사람은 마음을 낮추고, 좀 더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고, 섬기고, 마음에 위로를 주어야 하고, 좀 힘든 사람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알아주지 않고, 냉정하게 무시를 해도, 교회만은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곳이라는 마음을 가지도록 우리의 교회가 함께 울어주고, 함께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도 조금 염려스럽지만, 이러한 흐름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코스별 제자훈련을 해야 하고, 이것을 마쳐야 인정을 받고, 이것이 검증되어야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고, 목사님도 엘리트 목사님을 모셔야 하고, 교회의 부교역자, 사역자들은 모두 능력과 실력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소위 엘리트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가 과거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영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안타까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스템을 찾습니다. 또 다른 대안을 만들기 위해 다른 리트 코스를 개설해 놓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며, 그 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하루 하루를 소중이 여기며 살아가며, 주님과 함께 예비된 주님의 열차를 타고 주님과 여행을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탄 기차보다, 더 좋은 기차를 타려고, 더 좋은 기차를 타기 위해, 내 옆의 승객도 필요가 없으면 다른 칸으로 쫒아내고 싶어하고, 내 주변에 화려한 능력자, 엘리트들이 즐비하도록 만들어 놓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약하고, 힘든 지체들을 돌아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전 12:24,25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에서 꼴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반에서 꼴찌를 하면, 그건 그냥 끝입니다. 아무리 다른 것 잘해도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교회를 갈 때, 교회에서는 제 성적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지도해 주신 주일학교 선생님은 교육을 많이 받으신 여자 집사님 이셨는데, 저를 그냥 교회에 온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지금보다는 미래에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아이자체로 그냥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항상 교회를 가면 포근하게 맞아주시고, 제 근황을 물어 주시고,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제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제가 공부를 얼마나 하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어느것도 제대로 이야기하기 힘들었던 순간이었는데, 그 때 그 부족한 저를 격려해 주시고, 제 부족함을 그냥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다 말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일, 회사의 일, 사업의 일, 내 개인이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이야기하기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울어주고, 제일 힘들 때, 이것저것 설명해 주지 말고, 같이 있어 주는 것, 그리고 같이 있을 때 즐거움을 찾아서 같이 즐거움을 찾고, 그러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이렇게 같이 있는 것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꾸 설명하려고 하는데, 설명하지 말고 보여 주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 많았습니다.

        잘 준비된 일꾼을 양성하여, 파송하여 어느 곳에 가서든지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지금도 이 목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수정된 것이 있습니다.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실 분들이 우리 교회에는 많습니다. 너무나 큰 힘이 되고, 항상 주변 분들이 많이 부러워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좀 마음에 여유를 두려고 합니다. 인도에서 한인교회를 하다보니, 정말 잠깐 있다가 가시는 분들도 많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도 있고, 마지못해서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냥 잠깐이라도 교회에 와서 마음을 전환하고 가시려는 분들도 많습니다.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숨고르기를 하려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도 모두가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의 몸이고 지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대로, 요긴하고, 요긴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주님의 몸입니다. 누구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서로 힘들 때는 돌아보고, 함께 귀히 여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은 별로이지만, 나중에 정말 멋지게 주님의 일꾼이 될 수도 있고, 주님이 쓰시면, 지금보다 더 크게 쓰임을 받으실 분들이 지금 우리 교회안에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니느웨 153’이라는 프로젝트로 니느웨 1.5.3 ( 사람이 다섯가지 (기도하기,전화하기,식사하기,선물하기,편지쓰기)를 행하여,세 사람을 교회에 초청하기)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지금 설 자리를 잃거나, 저 같이 기차를 놓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같이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이웃을 찾아서 같이 아파해 주고, 울어 줄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기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전 12:26,27을 보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다가가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우리에게 덜 요긴하고, 덜 쓸모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제는 관심을 보이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분들도, 우리의 몸의 한 지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약하고, 힘든 그 사람...지금 그 사람에게 함께 해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나중에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이렇게 찾아 오셔서 별 것 아닌 나를 위해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이제 주님처럼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일므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지쳐있고, 약해 있을 때에 우리에게 오셔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신 그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힘 입어, 우리 주변에 힘들고, 지치고, 약한 사람들에게 주님처럼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을 계산하여, 살아왔던 나의 삶을 바꾸어 주셔서, 주님처럼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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