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요나서 1:4-6,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
2011년 3월 일본에서 규모 9.0의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동반되고, 이로 인해 원전에 심각한 피해가 뉴스를 통해 보도가 되었을 때, 많은 한국 사람은 그저 바다 건너 일본의 이야기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태평양 전체로 퍼져나가는 데 6년이 걸리고, 한국 연안에 도착하는 데 10년 가량 걸릴 것으로 전망한 보고서를 발표하자 엄청난 파장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방사능은 생명체를 기형화 하는 부작용을 가지고 오며 이로 인해 인간에게 오는 신체적 손상은 엄청난 데미지를 입힌다” 라고 일본의 저명한 학자도 최근 발표를 하고 그 증거 자료들을 제출했습니다.
지금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중동에서의 긴장 상태, 우리하고 관계없는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만, 돌고,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그 여파가 미칠 것입니다.
한국에서 인도를 올 때 차를 팔게 되었는데, 제 차는 제가 필게 되면 주로 중동에 수출해서 팔리게 되는데, 당시 리비아의 심각한 상태로 중동 전체에 제 차종의 판매가 어렵게 되어서 차 값이 좀 손해가 날 거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작년에만 해도 금값이 많이 올라서 그래도 금을 사는게 가장 좋은 투자 방법 중에 하나라고 하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금값이 엄청나게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금이 없는 저에게는 별로 큰 영양가 없는 기사라고 생각을 했는데, 최근 인도가 IMF 구제금융 신청 전 단계라고 까지 하는 발표를 들었는데, 그 이유가 인도 사람들이 돈을 풀지 않고, 모두 금을 사서 집에 두기에 경기가 둔화되고, 그로 인한 여러 경제 상황들이 도미노 현상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루피가 하락이 되고, 그로 인해 우리 교우들도 많이 어려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거나,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고,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혹 ‘세상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세상의 역사를 단절하거나, 벽을 쌓고, 때로는 사회 참여도 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만 하나님과 교제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닫아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모습의 대표적인 한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요나입니다. 지난주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시 이스라엘에 원수와도 같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을 반복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그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다고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부터 일이 시작이 됩니다.
요나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주의해서 볼 내용 중에 하나는 이 폭풍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바로 ‘여호와’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요나서를 통해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포인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저 말씀만 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소품들이 사용이 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큰 폭풍도 있고, 조금 지나면 큰 물고기도 있고, 나중에는 아주 뜨거운 태양, 그리고 호박덩어리, 벌레 등과 같은 도구들을 사용하셔서 요나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신다’라는 메시지를 들려주시는 것이 바로 요나서에 숨어 있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상 이 큰 바람, 큰 폭풍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도망가는 요나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우리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엉뚱한 피해자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서 1:5에 등장하는 이 배에 탄 선원들입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사공들은 바다에 대해서 아주 깊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뱃사람이 주로 하는 이유는 배에 짐을 실어서 그 운임으로 먹고 사는게 전부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바다에 던진다고 했으니, 이것은 눈에 보이는 엄청난 손실임을 알고도 살기 위해서 택하는 어쩔 수 없는 최종의 선택이였습니다.
지난번에 미국에서 아시아나기 비행기 사고가 있을 때에도, 그 와중에 자기 짐을 꺼내 오는 사람들 때문에 언론에서 엄청 시끄러웠습니다. 우리도 겪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이런 일을 겪으면 우리도 아마 장담하지 못할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손해를 보면서도 선원들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1:5에 보면 정작 이 폭풍의 원인인 요나의 모습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는 이렇게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도,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래 영적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느라 크게 신경을 써서 마음이 속상해서 잠을 잤는데, 그게 아주 깊이 들었나 보지, 뭐!” 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건 더 심각한 일입니다.
나중에 배가 가라 앉아 죽게 될 텐데, 자다가 그냥 죽게 되는 상황인데, 지금 배가 어떻게 되는지, 배 위에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죽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편하게 잘 죽으면 그게 좋은 일입니까? 세상이 지금 뒤집어져서 다 살려고 바둥거리고, 살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데, 아무 것도 못해 보고 그냥 편안히 눈을 감으면 그게 행복합니까? 우리 인생이 뭐 편하게 죽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편하게 죽기 위해서 사는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우리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이 세상에서 삽니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하나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져 주기 위해서 산다면, 요나처럼 이렇게 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죽는 일이 우리 인생의 목적인 분명 아닙니다. 사실 요나 때문에 이 엄청난 폭풍이 일어났는데, 정작 본인이 자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세상은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평안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어려움 속에서의 평안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폭풍같은 엄청난 일을 당해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수류탄의 뇌관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세상의 일이고,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고,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만 잘되면 되는 거야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교회 밖의 일은 나하고 별개의 일이야 라고 생각을 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도 요나처럼 배 밑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곧 배가 깨어져서 엄청난 물이 우리를 삼 킬 텐데,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잠만 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공산당들이 정권을 잡고, 러시아가 완전히 뒤집히고, 이로 인해 엄청난 폭동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정교회와 지도자들은 교리 논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천사의 숫자가 몇 개인지, 신학적인 논박이 크게 이슈가 되고, 러시아 정교회는 항상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이를 보고 당시의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가 불타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는 벽에 벽화가 잘못 걸렸다고, 그 그림을 바르게 거는데 온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지금 요나와 같습니다. 밖은 지금 배가 깨지게 된 어려운 시기인데도, 요나는 편안한 잠에 취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게 아니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소리라고 하고, 뭉개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만 들으면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아예 그런 소리들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끝까지 잘 들어보시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일어난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써 보았지만, 우리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당신들이 만약에 당신들의 하나님이 진짜면, 이 일을 분명히 해결할 대안이 있을텐데,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진심을 듣지 못하고, 그들이 지금 얼마나 힘든데,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는 지금 그들의 중심 내용을 듣기 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듣지 않습니다.
오늘 요나서 1:6에는 보다 못한 배의 선장이 요나를 만나러 옵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라고 책망을 합니다. 지금 요나서 1:5에 보면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만 던진 게 아니라,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면서” 라는 말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 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 그런 상태에서 선장이 이 상황에서 잠만 자는 요나를 깨우러 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요 1:6에는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일어나라, 제발 좀 일어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선장이면 배애서 가장 최고 결정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배와 더불어 바다에 대해서는 그 보다 능수능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창피 하지만, 자존심 다 내려놓고 요나를 와서 깨웁니다. “당신은 도대체 뭐하고 있냐?” 라고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장의 목소리에 귀를 잘 귀울여야 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당신 주변에 지금 일어나는 엄청난 일들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죽기 살기로 어려움을 넘기려고 애쓰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이 위기를 이기기 위해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어렵고 소망이 없던 시기에 이런 고통 받는 이웃들의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선교사님들도 우리 조선을 많이 도왔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가난한 우리들을 위해서 병원을 지어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어려운 시기를 이기라고 우리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때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조선왕조와 일본이 들어주지 않던 이야기를 우리 교회가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우리가 귀를 막기 시작했습니다. 들어야 할 때 듣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야 할 때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함께 울어 주어야 할 때, 같이 울어주지 못했습니다. 같이 울어주기라도 했으면 좋은데, 그렇게 울지 못했습니다. 지금 세상 살기 너무 어려운데라고 하면서 하소연을 하는데, 우리가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저 반복되는 우리들만의 이야기, 그들의 영혼을 위해 안타까워하고, 그들에게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받기 위해, 나를 위해 이웃을 전도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배가 깨지게 되어서 죽기 일보 직전인 그들에게, 요나처럼 잠만 자고 있습니다.
2007년 경에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께서 “현대인의 전도”라는 발제에서 요즘의 기독교는 반복되는 전도지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하기 보다는, 교회 주변에 있는 이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샘물교회 비전트립팀의 아프간에서의 사고 이후에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해서 그 동안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너무나 황당한 오해와 진실 되지 않는 누리꾼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의 내용 가운데에는 오늘 우리의 교회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의 비전을 그릴 때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생각한 것이 바로 “교회가 말하기 보다는 듣는 곳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목회를 배워 온 모든 현장들이 동일하게 문제가 발생되는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들어야 할 때 듣지 않습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정말 너무나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고, 의미 있고 보람되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듣지 않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대기업 전무셨던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정말 사고나 태도가 정말 신사적이고, 품위가 있으셨습니다. 제가 6년 정도를 함께 하는 가운데 장로님에게 들은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선교를 담당하신 장로님이셨는데, 교회가 선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CONSENSUS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기업에서도 이 CONSENSUS에 집중을 많이 하는데, 교회 안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데 이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이 단어도 사실 잘 몰랐습니다. 집에 와서 단어를 찾아보니, “합의, 의견 일치” 라는 뜻이었습니다. 장로님 이야기는 중요한 정책을 만들 때 충분하게 대회를 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는데, 당시 진행한 프로젝트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 하시면서 이 단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인도에 비전을 가지고 한참 목회를 구상할 때 제가 사역했었던 동안 교회의 전임 담임목사님이셨던 김동호 목사님의 메시지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동호 목사님이 동안교회를 떠나고 난 뒤에 동안교회에 부임을 했기에 사실 깊이 있게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인도 사역을 준비하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의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그림을 그릴 때 많은 부분을 배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김동호 목사님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 있구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 김동호 목사님이 하시는 목회를 보면 일반 목회하고는 좀 방향이 많이 다르십니다. 동안교회를 떠나시고 얼마되지 않아서 교회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그 정도 되면 교회 건축을 고민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교회를 지을 돈을 기초 자금으로 살기 힘든 쪽방촌 사람들의 창업 기초금으로 지원을 하는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손을 못 쓰는 탈북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자립을 도와주었습니다. 탈북자 청년들을 까페의 바리스타로 훈련시켜 그들이 커피점을 운영하도록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 중심을 보면, 교회로서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듣는 척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주위에 힘들어 하고 말 못할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CONSENSUS 없이,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계속 우리만의 목소리만 낸다면 우리도 세상이 염려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그 동안의 인도 선교도 어쩌면, 이들 인도의 소리를 듣지 않고, 우리의 방식대로, 일방적으로 우리 스타일을 고집해서 진행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우리 교회 청소년들과 ‘한국-인도 청소년 센터’와 인도 YWCA에서 공동 주관하는 행사에 우리 교회 청소년부가 참석을 했습니다. 2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인도의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기독교 학교 지도자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기독교인인 인도 UN 기구 중 유엔본부 다음으로 가장 규모가 큰 유네스코 본부에서 일하는 인도 크리스천 지도자와의 만남에서도, YWCA에서도 같이 하기를 바라는 여러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 YWCA에 피아노 교실, 미디어 센타 현황, 여성 직업학교 등....쭉 이야기를 듣는데, 진짜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지난주에도 기업의 사회적 참여인 CSR에 대해서 듣는데 할 일이 많았습니다. 9월에 인도 전체 선교사님들을 위한 모임에서 발제를 맡았는데, 제가 맡은 선교사 자녀에 대한 발제를 준비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으니 할 일이 많았습니다.
한인들 하고 사귐이 되면서 다양한 분들하고 이야기를 하니, 교회에는 나오지 않으시지만 그 분들이 교회에 대해서 하는 말을 많이 들으니, 어느 지점에서는 판단력이 생깁니다. 앞으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요나를 찾아가서 이야기한 선장의 말처럼, 우리 주위에 사람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이 그래서 그 사람들 말 듣고, 같이 사업하고, 사업 이야기 하다가 술 한잔씩 하고, 그리고 주일날 나가서 운동하고, 그러다가 교회에도 못 나오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요나처럼 잠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참다운 교인으로서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가운데, 계속 그들의 말을 들어 주고, 그런 가운데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그들을 어떻게 섬길지를 알려 주시는 그 일을 감당하시기를 부탁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 교회 전도지에 “세상과 소통을 하며 감동을 주는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 교회가 감동을 주기에는 이릅니다. 하지만, 세상과 소통을 하는 교회는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이 세상의 것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의 교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소통을 하려면, 우리가 더욱 우리의 것에 대한 분명한 준비가 되어져야 합니다. 요나처럼 잠만 자면, 세상과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선장에 요나에게 소통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이 바깥이 너무 힘든데, 너무 편하게 잠을 자고 있으니까, 성질이 나서, 따지러 간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교회답게 사명을 감당을 못하니까, 세상이 지금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그냥 이대로 무능한 교회로 넘기시겠습니까? 인도에서 뭐 잠깐 있다가 갈 건데...., 여러분 잠깐 있다가 갈지라도, 잠깐 있다가 가는 교회 일지라도, 우리가 인도에 있는 한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며, 한인들과 소통하며, 선교사님들과 소통하며, 인도인들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는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들어야 할 내용들을 그들을 통해서 듣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주님이 계획하신 일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도를 향해 가장 많이 울고, 가장 많이 고민하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서,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을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가가서, 들어주고, 귀를 귀울이고, 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이 땅에서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나를 바르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며 우리 인생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 수많은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도 또한 경험합니다. 인도라는 곳에서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수 많은 도구와 역사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요나처럼 잠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잘 때, 우리는 세상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바르게 서려고 합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 주변에서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힘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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