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 이야기 2
지난주에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큰 핍박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의 근거지를 옮겨서 안디옥이라는 지역에 세운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이민교회...
예루살렘교회와 비교하면 작고 초라한 이민개척교회이지만, 이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첫 물꼬를 트는 교회였고,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 교회가 했던 역사적 일들은 그 어느 교회가 한 일과 다르게 엄청난 가치가 있었음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쓰임 받게 되기까지 무엇보다도, “말씀 중심으로 준비된 교회”였고, 이를 위해 개척 초기에 초기정착이나 중요한 해외동포로써의 삶도 중요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를 둔 것이 사역자들을 통해 말씀을 배우는 일에 우선 순위를 드렸고, 말씀에 기초한 교회가 되었기에 후에 여러 가지 핍박도 잘 이기고, 역사에 남길 선교적 교회로 되었음을 지난주에 전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 시간으로 이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는 사도행전 13장 1-3절의 내용으로 우리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우리가 잘 듣고 귀를 잘 기울여야 될 내용입니다. 오늘 주시는 음성을 듣고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가 안디옥 교회 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중한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행 13:1에는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다”라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지칭되어 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가감하지 않고 일반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선지자들은 심각한 죄를 지은 백성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기에, 그것을 가감없이 전하다가,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르게 하여, 미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왕이나, 권세자들에게 전하다가 미움을 받고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들의 주된 역할이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힘든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라는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강한 영향력을 준 나라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국가를 괴롭게 하는 그 니느웨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주는게 싫어서 도망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의 역할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선지자는 경건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음성을 백성에게 전하는 일을 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말 그대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지식 전달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 지금가지 되어졌던 일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를 소개할 때 무엇보다도 이 선지자와 교사를 먼저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총회에 정기적으로 기도편지를 보내는데, 그 기도편지의 내용은, 되어진 일 가운데 가장 기억이 되고, 많은 시간이 걸려서 되어진 일을 주로 이야기 하게 됩니다. 아마 안디옥 교회를 이야기 하면서 이 ‘선지자와 교사’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안디옥 교회가 당시에 무엇에 가장 집중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말씀 사역에 많은 집중을 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말씀에 집중했는지, 우리가 말씀을 향한 집중에 어느 정도의 열심과 사모함이 이었는지를 우리는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하나님께 한 가지 죄송스러운 것은 우리 교회가 수요비전예배를 잘 드리다가 3월부터 쉼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 동안 수요비전예배 시간을 통해서 많은 말씀을 우리교회에 주셨고, 인도에서 우리가 고생스럽게 악바리같이 말씀을 향해 가졌던 근성을 잠시 쉬고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수요비전예배 자체를 하냐, 안하냐보다도, 우리가 이 안디옥교회처럼 말씀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한 몸무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제가 기대하는 우리교회는 우리 모든 교인들이 매일 경건의 시간 QT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요리해서 먹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가정과 사업에 하실 말씀을 매일 같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맞는 성경공부 모임에 하나씩 연결이 되어서 꾸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자리를 가지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게 되어지고,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바른 목적을 알게 되고, 우리의 남은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안디옥 교회는 이 부분에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행 13:1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어집니다.
행 13:1을 보면 그 선지자와 교사들을 소개하는데,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는 이름도 있지만, 좀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이들이 당시 안디옥 교회를 말씀으로 섬겼던 선지자, 교사, 즉 영적인 지도자들이였다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참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어집니다.
좀 생소한 이름들부터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입니다. 우리가 보통 영어 단어에서 흑인을 이야기 할 때, 니그로(Negro) 는 보통 흑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검다’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을 아프리카 출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대 자료를 살펴보면, 이 ‘흑인’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역사적인 자료들이 많습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 시절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 흑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쉽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총회장님께서 자신의 한 친구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태어나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하버드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말라위를 같이 방문했는데, 손님인 총회장님은 별로 관심이 없고, 이 말라위에서는 이 말라위 출신의 박사를 더 환영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국민영웅으로 대접 받고 지내는 모습을 보고, 저희 총회장님이 조심스럽게 한 번 물으셨다고 합니다. “당신 보니, 말라위에서는 국민영웅이고, 미국에서도 상당히 높은 신분으로 살고 있는데 간혹 흑인으로 차별을 경험해 봤냐?” 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총회장님께서 이 질문에서 sometime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의외로 그 말라위의 박사는 “있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가끔이라는 sometime라고 쓰지 않고, 항상이라는 always라는 단어를 써서 반문하는 것을 보면서 놀랐셨다고 합니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데도 흑인이기에 아직도 차별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데 초대교회 시절에, 특별히 단일민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기고만장한 유대인들이 이 흑인출신의 시므온을 자신들의 말씀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가르치는 자가 검거나, 희거나, 유대인이거나, 아프리카인 이거나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라는 사실에만 주목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 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레네는 지금 아프리카 이집트 옆 리비야의 수도 트리폴리의 옛 지명 이름입니다. 루기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하게 사용된 전형적인 로마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아프리카 사람이 어떻게 로마사람의 이름을 쓸수 있느냐를 연구한 결과 많은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는데 하나는 아프리카 사람이 로마사람의 양자가 되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경우는 아프리카 사람이 로마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 로마식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후자에 비중을 두고 이 구레네 사람 루기오를 노예 출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안디옥 교회가 이 노예 출신의 구레네 사람 루기오를 자신들의 영적 스승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에 자료나 그 자료로 만든 영화들을 보면, 노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도 덤으로 그냥 노예가 되고, 죽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크게 두 가지 도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움직이는 도구, 하나는 움직이지 않는 도구가 있었는데, 이 노예는 움직이는 도구로 분류를 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바깥 세상에서는 이름조차 못 내미는 노예가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안디옥 교회는 받아들입니다.
미조람에 가서 사람들의 속사정을 들었더니, 미조람 사람들은 인도 사람인 것이 싫다고 합니다. 인도 사람도 미조람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조람 사람들은 수도인 델리 근방으로 나와서 천한 일을 많이 합니다. 미조람 사람을 인도 사람은 천하게 여깁니다. 그레이트 노이다에서 차 사고가 났는데, 마침 타고 있던 한국인 주재원 부인이 나와서 몇 마디 배운 힌디어를 막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상대편에 있는 인도 남자가 다가와서 뺨을 내리쳤습니다. “어디 감히 미조람 것들이 끼어들어서 함부로 지껄여...”, 뺨맞은 한국 주재원 부인이 가만이 안 있죠?...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알고보니, 한국여자인지 모르고 미조람 사람인줄 알고, 힌디어까지 하니까 북동부 지역 사람인 줄 알고 인도 사람이 무시하고 뺨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취급을 받는 미조람 사람들이 놀랍게도 100%의 크리스찬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3년의 긴 과정으로 인도인을 선교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선교 훈련을 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인도 선교를 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인도에 선교를 하려고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분명하게 사용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천하고, 대접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인도 선교를 위한 가장 중요한 키가 바로 이들이라고 선교학자들은 입을 모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이 미조람 공동체를 섬기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 미조람 혼자 일을 하기에는 어렵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약간의 물꼬만 터 주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기에 선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튼 초대교회는 이 구레네 사람 루기오, 노예 출신의 말씀 사역자도 건강하게 수용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분봉왕 헤롯의 젓 동생 마나엔”입니다.
성경에는 헤롯 가문이 4번 등장합니다. 첫대는 예수님 탄생시에 예수님을 죽일 때 나오는 헤롯 대왕입니다. 권력 욕심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당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의 말에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씨앗이라고 판단하여, 두 살 아이의 남자 아이 모두를 죽이도록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이 헤롯 대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분봉왕 헤롯으로 자신의 조카와 결혼 것을 질책하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후임자라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죽일 계획에도 가담하고, 실제로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불리하도록 방치한 인물입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헤롯 아그립바 1세로 헤롯 대왕의 손자인데,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사도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둡니다.
네 번째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2세도 당시 교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주던 권력의 중심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헤롯 가문과 엮인 역사적인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게 되는 상황입니다. 분노가 치미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 가문의 사람, 마나엔이 안디옥 교회의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안디옥 교회는 이 마나엔도 말씀을 가르치기에 지도자로 받아들입니다. 그 가문의 이야기만 들어도 지난 시간 동안 저지른 일들이 생각나서, 선입견이 너무나 큰데, 지금 그 가문의 사람이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총회장님께서 지금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런저런 것에 너무나 많이 얽메여서 정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역론, 학벌론,어디 출신론등이 너무 이리 얽히고 섥혀서 발 붙일 곳이 없다는 탄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가 들은 것이 요즘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와도 한국 기업 인터뷰 담당자들이 자기 출신 학생들 뽑아주느라 연고가 없는 사람은 이력서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가 누구였는지, 뒷 배경이 무엇이였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성실하게 가르치는지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낮선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낮선 남의 나라 땅에서 이눈치 저눈치, 매일 같은 시행착오, 예루살렘에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들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도, 이렇게 살게 된 이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남은 생애를 그렇다면,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곳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말씀을 가르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만 바로 가르치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는 바른 스승이라는 그 사실 하나라면, 그의 출신이 헤롯집안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등장인물이 바로 사울입니다.
헤롯 못지않게 정말 그 이름조차 듣기 싫은 사람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오게 만든 사건이였던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모두가 다 안디옥으로 좆겨 왔다면,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울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이 사울 때문에 정들었던 고향도 떠나고, 그리고 갑자기 나오느라 재산도 잃은 사람이 많고, 그 모든 것을 누구에게 따지고 보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사울인데,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캄보디아는 1970년대 말 공산정권 크메르루즈 군이 들어와서 우리나라처럼 동족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때 소년병으로 무참한 학살을 감행한 세대들이 지금 50대, 60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때 부모를 다 잃은 자녀들이 지금 캄보디아의 20,30대입니다. 이 이 두 사이는 절대로 용서하기 어려운 사회로 남아 있습니다. 내 가족을 죽인 사람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는 가정 이야기를 꺼내는게 쉽지 않습니다. 뚜엉슬렝 박물관에는 자신들의 부모님들의 죽기전 사진들이 걸려 있고, 그들을 죽인 사람들의 얼굴도 공개되어 있는데, 이 원수지간의 사람들이 한 시대에, 한마을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말이 같이 사는 거지, 언제 어떻게 폭발될지 모릅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도 사울로 인해 받은 피해는 그 어디다가도 보상 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회개를 하고, 회심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삼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가장 많이 돕는 후원교회의 역할까지 감당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안디옥 교회를 제가 스승처럼 모시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바울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바울이 사울이였을 때의 행실을 다 알고도 그를 공동체에 받아주고, 그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제대로 된 사역자가 되도록 섬긴 안디옥 교회의 영성이 더욱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교회입니다.
스펙을 중요시하고, 배경을 중시하고, 뭐하나 흠집만 있어도 완전히 매장이 되는 요즘 사회에 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은 당시에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소개한 사람들, 흑인 출신, 노예 출신,원수 가문 출신, 그리고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가해자인 바울도 오직 한 가지 이유,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자매님라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교회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이점을 우리가 잘 배워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의 이유,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앞으로의 방향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가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람의 가능성도 가려서는 안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품었던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어디 주재원이래....아이고 직장에서 막내래...인도 온지 얼마 안됐데....
저 사람 전에 이런 사람이였데.....
이런 이야기가 안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주님께 예배 잘 드리기 위해서 모인 형제 자매입니다.
하나의 목적 주님을 위해 예배 잘 드리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 함께 잘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안디옥 교회처럼, 서로 존중해 주고, 세워주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그리스도를 더울 알아가기 위해, 서로의 출신이나, 과거의 경력을 문제삼지 않고,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성하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서로 잘 융합되어 함께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안디옥 교회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량을 주님의 능력으로 키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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