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4일, 사도행전 11:19-26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였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부활에 대한 소식 못지않게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충격을 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의 삶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누구하나 좀 내놓을만한 이력서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대다수를 차지하던 어부들, 좀 특별했다고 하면 세리 마태가 출신보다는 직업이 언급되었지만, 당시 세리라는 직업도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세금을 걷은 세리라는 직업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알아주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제자들이 실천하고, 그 실천의 댓가로 때로는 순교도 하고, 타협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타협하지 아니하고, 분명하게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고, 그 모습을 따르는 교회와 공동체를 보면서,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 보았던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과는 분명하게 차별을 둔 그들의 삶을 보면서 당시의 사람들은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들의 삶속에서 보여 주는 신실한 모습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이슈였습니다. 세계의 선교 역사속에 바이킹들은 호전적이고, 전투를 좋아하고, 많은 곳을 정복하고, 지배하던 민족이였습니다. 이들은 800-1200년대 경에 유럽을 암흑기로 만들었던 위협 세력이였는데, 이들은 선교훈련소들을 학살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왔었는데, 특별히 수도사들을 종으로 팔아버리는 일들을 좋아했었습니다. 하지만, 무력으로 정복을 했던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감동을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많은 바이킹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사이판에는 중국 노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중국 본토보다 약간의 신앙적 자유가 있어서 그런지, 믿는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많은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주일에도 일을 해야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워낙 성실하게 일을 잘하기에 공장 사장과 간부들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도록 배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600만명중에 1.4%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립운동이나, 이 나라를 일본의 압제에서 살리는 대부분의 운동은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3.1운동 당시에도 이 일로 가장 많이 감옥에 들어간 종교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그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빌립보서 커피브레이크반을 섬기면서, 바울 사도가 여러번 강조했던 말 가운데 “자신을 본 받으라”는 말을 여러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빌 3:17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얼마 안되었고,주님이 곧 오신다고 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말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였고, 도구였습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되기까지는 한참이 흘러서야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록이나, 제자들에게 전해 준 내용들이 언어로 전달이 되던 시기였기에, 바울 사도가 그러기에 “나를 본 받으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그대로 지키려고 살기에 성경이 없었던 그 시기에는 정말 이렇게 밖에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를 본 받으라”는 말이 얼마나 부담되는 말씀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가장 큰 핵심이 ‘사랑“의 계명이기에 이 사랑을 직접 실천하고, 삶으로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하기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그 삶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예수님처럼 내 주는데에까지도 갔었기에 이렇게 예수님처럼, 그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살려는 부활의 증인들을 보면서, 세상의 사람들은 놀라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안디옥의 위치는 지금으로는 터키 중앙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당시 로마의 중요한 식민도시로 지금의 터키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요 관문으로 사용이 되듯이, 당시에도 많은 세계의 사람들이 모인 지역이였습니다. 이곳에 안디옥교회는 세워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19을 보면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20절에는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특별히 부활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정말 많이 모인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이를 위해 이 지역에 사역자를 파송하기로 결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이 안디옥에 있는 교인들에게 일년 정도 그리스도의 새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행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의 가르침은 아마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그냥 듣고만 가지 않고, 그들은 사도들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대로 사는 삶을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였지만,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짓밣힘에도, 그렇게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죽기까지 내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하신 여러 기적들이 정말 일어났을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실제로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말씀들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종교나 철학에서 가르친 것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역시, 부활의 증인되었던 제자들처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하루 그냥 목적없이 살던 그들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생겼고, 그 목적을 위해 그들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증인되었던 제자들처럼, 자신들도,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게되자, 그들도 제자들과 같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이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듣지 못한 예수님을 듣고, 안디옥 교회에 모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놀랍니다. 가정에 놀라고, 이웃이 놀라고, 직장과 사회가 놀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이 안디옥이라는 지방은 뭔가가 이슈가 생기면 별명을 잘 붙이는 도시로 유명합니다. 아마 요즘 우리가 말하는 “누리꾼”이라는 말로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말과 글을 옮기는 사람들을 지칭하듯이 그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황제가 이 안디옥 지역을 방문해도 사람들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일어난 교회를 통한 사람들의 변화도 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큰 이슈가 되었든지, 이들에게도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별명은 행 11:26에 나온대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말 뜻이 있습니다. 당시 언어로는 “크리스티아노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 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사용한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는지, 도시에서 이렇게 “당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했습니다”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생활을 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에 입대해서, 고참들에게 신고식을 하는데, 노래하라고 해서, 축복송을 불러 주었습니다. 제 동기가 “비내리는 호남선”을 불러서 분위기 엄청 올려 놓았는데, 제가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뒷 부분에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라고 끝맺을 때 고참들의 표정은 정말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최전방 GOP이고, 이라크에서 걸프전이 발발했고, 그 때도 북한이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전군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시기였는데, 그 냉엄한 분위기에 신입 이등병이 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자....말로 형언할 수 없던 긴장이 나돌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대가 교회를 잘 못 나가게 하던 때라.....
저도 그 뒤에 바로 별명이 붙었습니다. “예수쟁이”
우리말 쟁이는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보다 더 우리말로 가깝게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 ‘예수쟁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예수님처럼 살아야 우리의 정체성이 제대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리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기에 양보도 많이하고, 희생도 많이 하고, 사랑도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자기 목숨을 주는 사랑의 자리까지도 가야하기에 이 ‘예수쟁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붙어서 살기 시작하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 못지 않게 이 ‘예수쟁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직접 몸으로 듣습니다. 아니, 그들의 삶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르게 살아가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삶의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서로 도우며, 하나되는 이 ‘예수쟁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계속적인 역사에서 반복되어지고, 오늘에도 우리에게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이 부활의 소식만 듣고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이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후 2:15에는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이 냄새가 때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역겹기도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기에 바둥거리고, 남을 속이고, 경쟁사회에서 이겨야 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은 너무 고결하기에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합니다. 고후 2:16을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때로는 너무 고결해서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이 좋고, 그리스도 없이 경험되는 일시적인 세상의 만족이 좋아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미련해 보이고,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 생명의 삶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불려집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귀한 호칭보다는 “개독교”라는 말을 많기 듣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향기를 내지 못하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악취로, 일반인들도 그 냄새가 참을 수 없다고 우리를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진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너무 많이 한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 훈련을 하시면서 늘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술한 제자화 성경공부 책에는 아예 이름을 “작은 예수가 되라”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이것, 저것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문제없는 교회, 이상적인 교회, 좋은 교회가 되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교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는 이런 “완전한 교회는 없구나!” 100점 만점에 100점 만점의 교회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이다보니, 아직도 시스템에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아이들 공과 공부할 장소, 찬양대 연습할 장소도 없고, 한인교회라 한국음식을 좀 먹어야 하는데, 주방도 없습니다. 교회에 여러 훈련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지난 1년 10개월의 시간들을 돌아보니, 이래저래 부족한 모습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 스스로 “우리교회가 제일 좋습니다.”라는 말을 제 입으로는 솔직하게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해야될 일이 참 많습니다.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이 자신도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금 10년만에 성도가 10,0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갈수록 더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히려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성도들 몇 명 없어서 같이 끝나고 밥먹고, 오순도순하게 지날 때가 좋았는데, 그때는 서로 몰라서 그냥 그렇게 지냈지, 조금 지나고 나니,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좋다고 교회에 몰려와도 자신은 우리교회가 좋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했고, 우리가 자신 있게 좋다고 하는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상의 교회만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허점도 많고, 부족함도 많고, 요즘 사회에서 개독교라고 놀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자랑스러움이 아닌, 부끄러움이 될 정도의 가장 최악의 시대인 지금,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 옛날 안디옥 교인들에게 불렀던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다시 찾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속해야 되고, 닮아야 되는 “그리스도”를 빼 버렸습니다. “교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라는 것을 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는 삶과 순종을 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교회를 빙자해서 다 하는 모습이 있기에 일반인들이 우리를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점잖은 표현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목회자도 주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 교회를 이끌어 가는 대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붙여준 별명처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예수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호손의 “큰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미국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傳說)을 듣습니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으나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칩니다.
우리가 이 어니스트처럼, 마음속에 “우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해?, 참된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누굴까? 나는 어떻게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하는 일일까?”를 늘 삶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고 그리스도인이 된 안디옥 교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면서,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도 이렇게 따라 배우라고 오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고, 한국도 아닌 인도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도 이렇게 되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계십니다. 이곳에 있는 많은 한인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인도인들이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부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인도에서 “더 열심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인도에서 주님이 쓰시기에 준비된 그리스도인들” “주님이 쓰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의 부활 사건 이후 변화된 제자들의 삶을 보고 놀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일평생을 신실하게, 진실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부족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주시고,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의 멤버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게 하시고, 인도에서도 주님이 주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