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마태복음 21:1-6, “주가 쓰시겠다 하라”
요즘 북한의 무리한 행동들로 인해 염려가 많습니다. 언론은 사소한 것도 굉장히 부풀려 보도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너무나 차분하게 보도가 되고 있는 느낌이 있고, 진행되는 사실들은 긴장의 분위기의 강도를 점점 더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설마’라는 마음이 이성을 통해 이번 일을 냉정하게 보고 있지만, 우리의 감정은 ‘혹시라도’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속히 이러한 위기들이 가라앉고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지금과는 좀 다른 분위기이지만, 냉전의 시대에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속히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공존했던 이 불편한 관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은 최근에 그래도 가장 큰 뉴스였던, 예수님이 뭔가를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조각으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신 정도면, 소경을 보게 하고, 물위를 걸으시고, 이런 저런 기적들과 그에 따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을 본다면, 예수님은 당시의 불편한 상황을 충분히 뒤 엎을 수 있는 분이라는 사람들 사이의 기대감도 충분히 받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뭔가 지금과 다른 로마정부로부터의 독립된 새로운 나라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게 됩니다.
마 20:21-22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의 어머니의 간구가 나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과 그 측근도 이렇게 생각을 했다면, 예수님 주변의 군중들 역시 뭔가 큰 기대를 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좀 초라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나귀라는 것...인도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그렇게 대접 받는 동물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 주기를 바랐기에, 나귀보다는 군마를 타고 들어오시기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군마는 많은 군대를 거느린다는 의미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전쟁의 위엄들을 나타내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군마가 아닌 나귀를 타셨습니다. 당시 나귀는 왕이 평화시에 타고 다니던 관습이 있어서, 이 나귀를 탄다는 것은 평화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고 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21장에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모습이면서, 과거 구약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순간이며, 이것은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주님의 상징적이고, 의미있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나고, 중대한 역사에, 사용된 “나귀와 나귀새끼”를 보게 됩니다. 이 중요한 일에 사용된 유일한 소품입니다. 마 21: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이 나귀들을 준비시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 말씀 “주가 쓰시겠다하라”라는 말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엄청난 일을 위해 나귀와 나귀새끼를 사용하시겠다는 계획을 보여 주셨습니다. 도대체 이 나귀들은 뭐길래 이렇게 귀중한 일에 쓰임을 받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을 더욱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인 바울사도도 그의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들을 보면, 환경과 상황은 바울 사도가 주님의 능력을 쓰는게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가는 곳 마다 겪는 어려움, 그리고 박해, 그리고 위기들....그 무엇하나 보장이 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바울사도는 자기가 주님의 능력을 빌려서 사용하고, 그 어려움들을 위기는 것보다는, 지금 환경은 비록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그 힘든 순간과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더욱 쓰임 받기를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을 쓰기보다는,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자세를 볼 때, 교회안에서도 두가지 부류의 성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0장 29-34을 보면 두 맹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변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할 정도로 큰 소리로 자기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위해 주변도, 상황도 없고, 오직 자기의 문제만 고침을 받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을 낫게 해 주십니다. 구하는 것을 예수님께로부터 얻습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간혹 이러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 구하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우리가 필요한 것만 구하는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음을 바꾸어서, 거꾸로 주님이 나를 필요해서 사용하시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오늘 나귀 새끼들을 보면서 뭔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나귀들을 당시 역사의 중심으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는데,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는 영광스러운 기쁨을 경험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 당시 대통령 친필로 쓴 편지를 하나 가지고 계셨습니다. 내용은 선거에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상당기간 동안 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하셨던 것을 제 어린 기억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은 청와대 문양이라든지, 청와대 관련된 것을 상당히 귀중히 여깁니다. 대통령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는 이 중요한 일에 쓰인 나귀 새끼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찮은 짐승이지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찮은 짐승이지만, 함께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없던 가장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본문 21:3을 보면 이 나귀들의 주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집에 있을 때는 별 볼일 없는 짐승이였지만, 주님을 위해 귀중한 자리에 함께 쓰이게 되었습니다. 나귀를 기르던 주인이였지만,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만나고, 환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달려갈 때, 아마 그 주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예수님이 자신의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것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간혹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쓰임을 받아서 주님의 일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기분....혹시 느껴 보셨습니까?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과 동업을 한다는 그 사실...그것은 정말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정말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냥 조용히 교회를 다니고, 대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선교단체에서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가는데,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선교바자회를 하는 일이였는데, 그 일을 제가 맡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이랜드에서 많은 옷을 기증해 주셨고, 그것을 팔아서 수익금으로 학생들 선교를 가는데 비용을 만드는 일이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일이였지만, 그것도 엄연히 따져보면, 옷을 파는 일이고, 학교 정문에서 파는 것이라 챙피할 수 있는 일이였지만,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선교 바자회를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간이 매장을 만드는 일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선교 바자회라 앞에서 찬양 공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옷을 파는 전체 행정을 관리하고, 후배들과 함께 일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꽤 잘 되었었던 보람도 있었지만, 난생 처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기쁨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제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제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일도 너무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저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더 감사합니다. 저 자신을 잘 알기에 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때때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심을 보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더 큽니다.
오늘 주님이 성경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지만, “주가 쓰시겠다하라”는 이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지만, 이러한 부름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흔적을 가졌는지를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고, 혹 지금까지 이것이 작았다면, 우리의 인생에 이 흔적이 많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 나의 가정, 나의 교회가 “주님이 쓰시겠다하라”는 이 음성을 얼마나 많이 듣고, 그에 따라 충성스럽게 살았는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천국에 가서 이것을 결산할 날이 올텐데, 주님을 믿고, 주님을 필요할 때마다 사용한 적은 많은데, 주님이 우리를 사용한 날이 적으면,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리문답에 나오는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고 그에 대한 대답이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진짜로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간혹 사람은 돈을 가장 중히 여기지만, 그 돈이 때로는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하고, 많이 가져도, 그것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명예도 그렇고, 권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쁨과 사라지지 않을 행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해 주셔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어 집니다.
이번에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강사에 의례적으로 방지일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102세 이십니다.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로 가시고,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님으로 원로목사님으로, 은퇴를 아주 오래전에 하셨음에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계십니다. 저희 교회를 위해서도 격려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90세에 인터넷을 배우시고, 지금도 선교사들의 고민과 걱정을 들어주시고, 인터넷으로 답변을 해 주십니다.
이번에 영락교회 선교사 안식관을 잘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명동이라는 좋은 위치와 더불어 선교사들이 사용하도록 배려 해 준 여러 혜택을 느끼면서,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세우신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영락교회 최창근 장로님이라는 분은 우리가 잘 모르는 생소한 이름입니다.
이 최장로님은 지난 1월 8일 새벽 9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셨는데, 평생을 영락교회 故 한경직 목사의 사역과 함께 한 재정적 조력자요 ‘수제자’였습니다. 1915년 1월 15일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고인이 한경직 목사님을 처음 만난 건 열 살 무렵이었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지내던 고인은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통학교(만주 안동현)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 가게의 점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초가 돼 후에 큰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점원으로 일하면서 출석했던 교회가 신의주 제이교회였는데 이 때 담임목사가 한경직 목사였습니다.
해방 후 서울로 월남한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가 서울에서 영락교회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영락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한경직 목사님의 동반자요 후원자로서 장학사업과 학원선교, 나눔 활동 등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선교사업을 돕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던 최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이 선교 사업을 계획할 때면 늘 재정적인 문제와 행정 등을 상의하면서 조력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954년 한경직 목사님이 전쟁 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보린원’과 ‘모자원’을 설립할 때 최창근 장로님 보린원 이사를 맡아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한 목사님의 영향으로 교육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최창근 장로님은 영락교회가 설립한 영락 중·고등학교의 이사로 참여했고, 북한에 있던 숭의여학교와 보성여학교 재건에 적극 참여하면서 후에 보성학원 이사장직(1977-2008년)을 맡게 됐습니다.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던 그는 평소 “하나님께서 내게 사업체를 계속 맡겨주신 것은 기독교적 사업경영으로 성공을 거두어 하나님의 사업에 많이 사용하라는 뜻”이라면서 선교와 교육사업에 수천억원이 넘는 돈을 쾌척했습니다.
1956년 경기도 남양주에 33만여 제곱미터(약 십만여평)의 땅을 기증해 영락공원 묘원을 조성했고, 1976년엔 4억원 정도의 토지를 매각해 영락고등학교 건축에 기여했습니다.
또 보성여고 강당을 건축할 때 2억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가 설립될 당시 26만 제곱미터(약 8만평) 가량의 부지를 후원하는 등 기독교 교육사업에 큰 힘을 보탰습니다.
이러한 헌신을 인정받아 그는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성경을 배포하는 기드온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1966년 국제기드온협회 전국회장을 맡아 민족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발전한 1970년대엔 기독실업인회를 만드는 일에 적극 나서 1977년 세계기독실업인대회를 유치했고 이를 계기로 부활절연합예배를 초교파로 드리는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군복음화 후원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목사님과 함께 72년 창립모임을 가진 뒤 1976년 군복음화 후원회를 조직해 전국의 군부대 교회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가 난 뒤 자녀에게 재산을 남겨주지 못하게 됐고 평생 일군 회사를 잃었는데도 실망하지 않아 지인들은 그를 구약성경의 ‘욥’에 비유하며 고난받는 신앙인의 표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밖에도 고인은 자신의 부지를 기부해 CBS 기독교방송이 목동사옥을 신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한경직목사 기념사업회'(1981-2013, 32년)와 '세진회 이사장'(1990-2010,20년)과 ‘월드비전 이사’(1989-2004, 15년), ‘한국YMCA 부이사장'(1987), 북한동포돕기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위원회 위원장(1997년) 등 수많은 기관과 단체들을 창립하거나 후원해 오면서 한국 기독교 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습니다.
영락교회 한진유 장로(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이사)는 "최창근 장로는 자신의 사업을 통해 수많은 기관을 위해 후원하고 봉사했지만 자신의 재산은 거의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신앙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후대 신앙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어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귀한 분이 있었다는 것을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잘 알았지만, 그 뒤에 이런 분이 있었다는 것은 잘 몰랐었습니다.
이분의 삶에는 곳곳에 주님이 쓰신 흔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도 한번 꿈꾸어 봅니다. 우리의 일생이 주님을 나의 인생에 쓴 기억이 많은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주님이 나를 쓰신 흔적이 많은 삶을 살 것인지를.....
오늘 나귀새끼, 그리고 이를 빌려 준 주인.....하찮은 것들이였지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번에 다시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교회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하고 싶은 일,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일에 쓰임 받고 싶습니다.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도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주님이 쓰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하찮은 것을 내 놓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여러분 이것 아시죠...주님이 절대 없어서 그런분 아니시라는 것...
그러기에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 잘 아시죠...
우리가 목표한 인생,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 주님께 얻어가는 이생이기보다는
우리가 계획한 인생보다 더 큰 그림을 가지고 계신 그 분께 맡기고 살아가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럼 우리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될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믿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주가 쓰시겠다하라”는 음성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인도에서 함께 신앙하는 우리가 모인 이 델리한인장로교회를 통해서 주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우리의 인생을 내가 세운 목표, 나의 야망으로 만들어가는 삶이 아닌, 나보다 더 크고, 높은 비전으로 계획하신 주님의 인생에 따라 살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나만을 위한 삶, 나의 가정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이 뜻 하신 삶을 발견하고, 주가 쓰시고자 하는 때에 우리가 온전히 쓰임 받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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