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8일, 시편 50:23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의미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인 영국성공회와의 신앙적 갈등으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메사추세츠 연안인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하게 됩니다. 신대륙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해 추운 겨울을 지나고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는데, 흉년과 식량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신대륙에서 첫 번째 추수를 하고서, 자신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추수감사절의 모태였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유래한 절기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1년에 세 번씩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수장절이 그것입니다(출 23:14-16).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오순절은 첫 수확을 거둔 후에 지키는 절기로 맥추절 또는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장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하는데, 그해 거둬들인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풍성하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지키는 감사절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추수 감사절에 새 곡물로 만든 음식과 추수 감사절에 관련된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배 후에 우리 교우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오늘 우리가 준비한 과일은 우리의 이웃에 계신 선교사님들...특별히 구르가온,델리,그레이트 노이다에서 제일 연로하신 선교사님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최근 GSS의 박선희 선교사님이 암으로 지난주에 수술을 받으셨는데, 이곳에 남아서 GSS학교를 외롭게 섬기셔야 하는 전상희 선교사님이 지난주에 댕기에 걸리셨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댕기입니다. 내년에 환갑이신데 연세가 있으신데 잘못 드시고, 어렵게 사역을 하시니 힘드신 것 같습니다. 작지만 우리가 나누는 것으로 큰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전화 드리고 위로의 뜻을 전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은 이웃을 돌아보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고 위로하고 서로 돌아보는 날입니다. 이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아삽은 다윗시대의 성가대장이였습니다. 시편에는 이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가 12편 정도가 있습니다. 다윗이 삶의 고백 가운데 올려진 시편이 많지만, 이렇게 온전히 찬양만 하는 찬양전문가의 시편입니다. 찬양을 깊이 드리는 분들을 만나면, 그 분들만의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아삽도 아마도, 항상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50편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외식적인 예배만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예배의 회복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외식적인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존경하지 않고, 고마워하지 않는데, 간혹 직장 상사이기에 우리의 속마음을 숨기고 아첨을 한다든지, 속에 없는 말을 하면서 윗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를 “외식적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직장 상사들이 가장 힘들때는 자기 밑에 있는 직원이 배신을 하든지, 특별히 아주 신뢰했던 사람이 그 동안 보여 주었던 모든 행동이 “외식”이였다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보면, 가끔 회장님들이 쓰러지는데, 정치적인 압력, 사회적인 압력이 와도 잘 버티다가 자기하고 가장 가까웠던 충복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 장면에는 꼭 심장마비가 이어집니다. 그 만큼 충격이 큰 거죠!
직장 상사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하기 보다는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누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자기의 가장 아끼는 아들을 다른 이를 위해 죽는데 기꺼이 보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요청하는 수 많은 일들을 모두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고민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어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도 더 많이 고민하십니다. 우리가 속상해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이 잘 되면 너무 좋아하십니다. 주님도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힘이들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동일하게 주님은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는 것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속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일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과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만남속에는 속이는 것도 없고, 더 꾸미거나, 더 과장되게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순수한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그 마음을 잘 알았던 찬양인도자 아삽은 하나님 앞에 외식하지 말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50:23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본문을 그대로 풀어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감사가 예배의 아주 중요한 핵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로 드려야 합니다. 한주 동안 나에게 주신 은혜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돌보아 주셨는지를 감사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사를 있고, 우리의 고민이나 문제만을 가지고 예배로 나아옵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한 응답을 못 받거나, 설교에서 자신의 문제가 건드려지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배는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소에 앞서서, 하나님이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를 어떻게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고, 돌보셨는지, 그 손길을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종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주일의 기본 동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3일 동안만 본다면” 이라는 책을 보면 헬렌켈러의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3중고를 가진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 설리반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모습을 내손 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사귀들,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싸인이 반작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라고 했습니다.
이 헬렌켈레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할 감사의 제목이 적은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전 군 형무소에 두 명의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죄수는 총기 난동으로 살인을 했고, 다른 죄수는 실수로 동료를 죽여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중 총기 난동 사형수는 자기 몸을 해부 실험용으로 10만원에 팔았고, 그는 ‘이왕 죽을 것 고기나 한 번 실컷 먹고 죽자’는 생각에 3만원을 쓰고 7만원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른 사형수는 1만5000원이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한 후 죽기 전 감사의 표현으로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무엇에 감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기업에서, 우리의 만남속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지를 늘 되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할려고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입니까?”라고 늘 되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저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속에서 항상 감사의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미혼모, 107kg의 뚱보, 마약중독자가 되어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살아온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기구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는 망가진 딸에게 하나님과 성경책을 소개해주고 자신이 암송하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됨으로써 새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진리가 그녀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집중한 그녀는 지적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많은 독서의 영향으로 열아홉 살에 TV방송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흑인 여성으로서 최초의 앵커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후 볼티모어 방송국으로 옮겨가서 골든타임의 앵커를 맡았으나 감정이 오버한다는 이유로 가장 인기 없던 토크쇼의 진행자로 좌천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불행했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통해 그 토크쇼는 최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대성공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겐 잠자기 전에 감사의 일기를 쓰는 좋은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감사해야할 다섯 가지를 매일 기록했습니다. 거창한 내용이 아니라 하루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도 늘 QT를 하면서 마지막에는 매일 이 인도 땅에서 감사한 것을 3가지씩 기록을 합니다. 어떤 날에 보면 참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표현을 QT노트에 적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2012년에 감사 제목을 적었는데 이전해에 감사의 제목들은 주로 외국 어디에 간 것들에 대한 감사였는데, 이번에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주신 감사의 제목들이 많았습니다. 담임목사가 되어서 그런지, 교회에서 되어진 일들 하나하나가 감사의 제목이 많았습니다. 이전 같으면 오늘 같은 날은 오후에 식사 준비하는 거, 불판 준비하고, 이것 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을텐데, 이번에는 정말 우리 집사님들이 다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친 분들 만나고, 선교사님들 위로하고, 말씀 준비만 했는데, 이렇게 되도록 우리 교회에 좋은 분들을 많이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놓쳐서 그렇지 감사할 내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제목을 적다보니, 조금 분별력이 생깁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소유, 내가 경험한 일로 인한 감사도 좋지만,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감사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고, 그 과정속에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땅히 드려야 할 반응”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마땅히 드려야 할 반응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드려야 할 반응인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광야에서, 오랜 고난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 시키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를 발견하는 삶.....
하나님은 이 감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옳은 행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오늘 본문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감사가 구원으로까지 연결됨을 오늘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도땅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먼지와 다른문화, 힘든 환경들, 댕기와 말라리아 등....참 감사의 제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찾고 기다리시겠습니까? 그 감사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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