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6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히브리서 11:33-38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대부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빌립은 북아시아에서 사역을 하다가 터키에서 채찍을 맞고 감옥을 갇힌 후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사역을 하였고,도끼와 창이 합쳐진 미늘창으로 살해를 당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였지만,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로 맞아, 결국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가롯 유다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임명 되었으나,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고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안드레는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에서 X형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두 번의 탈출기회가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교를 선택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사드리아에서 무자비한 처형 방법으로 몸이 찢기며 순교했고,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선도 받고 나같은 자가 감히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없다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뒤집혀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에데사라는 지역에서 십자가 형을 받았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가죽이 벗겨져 순교를 했습니다. 인도 지역에서 사역을 했던 도마는 창이 몸을 관통해서 순교했고,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시몬은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영국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 졌습니다. 바울은 기도 후를 마치자 칼에 목이 베여 순교를 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인해 자신의 가장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온 토마스 선교사도 대동강에서 조선인들에게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였던 백홍준 장로도 평안감사에게 체포되어 2년 동안 갇은 고난을 받다가 결국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등을 통해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순교자유족회에서 출판한 “순교열전”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많은 순교자들이 나옵니다. 이들도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하나의 이유로 순교자가 되신 분들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이들의 신앙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졌을까요? 똑같은 믿음의 대상을 가진 우리는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얼마나 바르게 대답을 할 수 있는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의 교회 분위기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계속적으로 이어지던 교회의 핍박들, 서두에 열거했던 계속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죽음들이 이어지면서, 많은 핍박들이 이어졌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11장 36절-38절에는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냥 읽기만해도 몸서리쳐지는 무서운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학살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면서 신앙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도대체 뭐를 보았기에, 뭐를 얻으려고, 그렇게 이들은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히브리서의 본문을 만나면 나와는 좀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안에 하나의 질문을 떠오르게 되는데 “나는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의 댓가를 치루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물론 주님이 주시는 구원은 댓가가 없는 우리 주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댓가의 삶을 살고 있는지,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르고 주님을 믿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께 목숨을 걸고 믿었는지를 우리는 한 번 쯤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아직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 같아서 쉽게 이야기 하지만, 막상 우리의 삶에 가깝게 다가오면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두렵습니다. 간혹 TV나 드라마에서 아픈 사람의 이야기만 봐도 마음이 콩닥거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분명하게 이 “죽음과 나의 관계”를 늘 잘 정립해야 됩니다. 이것이 잘 정립되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도 바르게 이어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정말 진정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전에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전에 자신의 가치관도, 명예관도, 재물관도 다 바뀌었습니다. 이 세상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고귀한 일에 자신도 주님처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삶속에서도 그 가장 귀한 것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내것을 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생명이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넉넉하지도 않았고, 신앙생활을 하기에도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삶속에서 요구되는 댓가를 기꺼이 치룰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댓가를 치루기보다는 뭔가를 얻으려고 주님께로 나옵니다. 내가 부족한 능력, 내게 부족한 그 무언가를 더욱 완벽하고, 안전하게 얻어내기 위해서 주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그 위대한 죽음과 부활의 그 사건을 기억하기 보다는 ‘신’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신’을 쥐어 짜내듯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을 많이 가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간혹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 뭔가를 요구하시면, 우리는 주춤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계산을 합니다. 손해쪽으로 뭔가가 기울어지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바꿉니다. 그래서 교회도 얻기 위해서 오는 성도들을 위해 주기에 급급합니다. 좋은 서비스로 성도들을 위해 뭔가를 공급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있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프로젝트를 교환했는데, 한 대에 1억 5천인데, 두 대를 가졌다고, 그리고 이 장비는 한국에서 최고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규모의 교회로서 선교는 아주 미미합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빚 갚아야 선교한다고 합니다. 선교사님들하고 그 교회를 방문하고 나오는데 마음이 무척 씁쓸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만났던 나이스크 사람들은 그런면에서 보면 정말 다른 사람들입니다. 요즘하고는 거의 맞지 않습니다. 마케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그냥 예배속에서, 그냥 찬양속에서 모든 것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방법들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초대교회에 순교자들의 믿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한인들은 인도하고 다르게 풍요롭지만, 일들은 다 고됩니다. 하시는 일들이 조금은 어려운 일들, 미국 사람들이 잘 안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뉴욕의 경우 세탁소는 대부분 한인들이 다 맡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힘든 일을 전담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보여준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그 힘든 삶 가운데에서 뭔가를 더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들은 그냥 주님을 예배하는 그 자체가 즐거워 보였습니다. 90분, 2시간이 넘어가는 설교에도 어느 누구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인정 받고 보이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냥 그게 즐거워서 그렇게 합니다. 교회에 와서 뭐하나 더 얻으려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11장 35절에 “구차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본문을 깊이 보면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 구차히 라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 5000명 정도의 대형교회에서 있다가 총회로 오게 될 때, 그 결정이 싶지 않았습니다. 기관목사로 오면 득보다 실이 많다, 정치에 물이 든다 등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로 작정했기에 총회로 가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총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는 자리는 원래 총회 규정에 있던 자리가 아니라 “석좌”라고 하는 자리였습니다. 대학에서도 대학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외부에서 기금이나 연구비를 모아서 주는 교수를 석좌교수라고 하는데, 대학에서는 이 석좌 교수가 좀 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저희 총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석좌 간사로 총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총회에 들어갈 때 제 생활비를 동안교회에서 전적으로 다 책임을 져 주는 조건인데,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책임질 것인가? 라는 것이였습니다. 저를 지도해 주신 동안교회 담임목사님과 장신대 대학원장님이신 제 지도 교수님이 적절한 결론을 내려 주셨는데, 총회에 간사로 들어가는 만큼 그만큼의 조건으로 가야지, 위화감도 없고, 일을 하는데 균형이 잡힌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야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가는거라 그러려니 했는데,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사택이 지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교역자의 생활을 하면서 계속적인 공부를 하는 과정의 사역자들은 큰 돈을 모울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사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큰 과제였지만, 선교사님들을 섬기러 가는 일이라 수용을 했습니다. 덕분에 종로 5가인 총회에서 두시간씩 하루에 네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먼 곳에 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총회에서 일을 하는데, 먼저 오신 분들과 일을 하면서 하나씩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은 석좌 간사인데 가서 지내보니, 비정규직이였습니다. 총회는 노동법을 엄격히 적용해서 일을 합니다. 출퇴근 시간도 지문을 찍어야 하고, 외근,출장 개념에 월차,연차, 야간 근무수당, 특별 근무수당이 다 적용이 되는데, 저는 이 모든 규정에서 제외가 됩니다. 간섭을 덜 받아서 좋은 점이 있었지만, 저만 혼자 괜히 소외됩니다. 다들 연말정산 맏아서 환급 받는데, 저만 멍하니 있고, 매년 호봉 제도가 있어서 월급도 오르고, 퇴직금도 해가 지나면 쌓이는데, 저는 처음에 약정한대로 그대로 계속입니다.
어느날은 제 후배가 저녁까지 일을 하는데, 저녁 식사비에 제가 야근 수당이 없기에 자기가 대신 내준다고 생색을 냈습니다. 고맙기는 했지만, 그날 되게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묵상을 하는데 오늘 이 본문을 주셨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은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으로 자신들의 삶에서 자유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라는 말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돌아보니, 제가 너무나 구차하게 살았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사실 석좌 간사로 총회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고, 해외로 가지 아니한 선교사를 전액을 한 교회에서 후원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데, 소위 한국의 영락교회나, 온누리교회, 명성교회도 못 한 일인데, 하나님이 특별하게 만들어 주신 기회인데, 정작 제 자신이 본전 찾느라고 구차한 일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는 그 다음부터는 자유함이 생겼습니다. 총회에서 오래 계신 분들은 자신들의 규정에서 그렇게 받는 것이고, 나는 나인데, 괜히 비교해서 구차한데 신경을 썼습니다. 마음을 정리하니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그냥 그대로 놔두시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총회에서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이 소위 단기선교, 비전트립의 총회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교과서 같은 책을 만들게 되니 전국에서 강의가 계속 요청이 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간사들 수당이나 특별 수당보다 제가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서운해하는 마음도 해아려 주시고, 다른데서 알아서 채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꾸 하나님께 얻기만 하려고 하면, 우리도 구차하게 됩니다. 교회를 와도, 교우관계를 가져도 구차하게 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면 자꾸 뭔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관계가 안좋아지거나 거래를 통한 만남은 자꾸 뭔가를 얻으려고 탐색전을 버립니다. 그래서 뭔가를 얻으면 거리가 유지 되고, 뭔가를 잃으면 서운해합니다. 교회 생활도 유심히 살펴보면, 말이 많아지고,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이유가 다 “구차한데” 집중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뭔가 가질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으면 진짜로 봐야 하는 것을 못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서로 주게 됩니다. 아깝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몸을 버리심과 같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뭔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에 선교사님께서 피아노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인도에서는 피아노가 좋든 나쁘던 중고시장에서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물건입니다. 원래 성구나 성물은 새것으로 온전한 것으로 드려야 되지만, 인도에서의 상황은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저희 교회가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피아노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선교사님이 가족들과 상의하고 선뜻 연락이 왔습니다. 자녀들이 기증한다는 소식에 너무 기뻤다고, 사실 저희 교회의 첫 번째 피아노 반주하던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가정이였습니다. 자기가 한국으로 공부하러 가기전에 많이 은혜 받고, 힘이 되었던 교회에 자기의 피아노가 기증이 되어진다고 하니 너무 기뻤다고 합니다. 선교사 자녀로 와서 너무 힘들었을 때 그마나 위로가 되었던 것이 이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는데, 그 피아노가 저희 교회의 교회 피아노가 된다고 하니 이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큰 은혜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디다 팔면 얼마를 얻을 수 있지만, 기쁨으로 기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무지 정확하시잖아요.....피아노 옮기는 날 이 가정에 연락이 왔는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큰 언니가 장학금이 지정이 되어서 이번 학기에 200만원이 책정이 되었으니 가져 가라고....원래 장학금을 두 개까지만 받을 수 있는데, 생각도 못했던 장학금이 책정이 되어서 피아노를 옮기는 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인데, 학교에서 자신이 예배 반주자로 임명 되어서 고1인데도 전체 예배 반주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고, 그것도 피아노를 교회에 기증하는 날, 정확하게 하나님이 채워 주신 것을 보면 정말 놀랍다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얼마큼 드렸으니, 얼마만큼어치는 해 주셔야 되지 않아요?, 내가 이 만큼 교회에서 봉사하고 시간을 드렸으니까, 주님도 이 정도는 해 주셔야 되지 않아요?
우리 어릴 때 부모님이 제일 구차하게 보일때가 “야 너 지금까지 밥 먹인거, 옷 사입힌 거 다 물어내라”고 할 때 부모님이 무섭기는커녕 얼마나 구차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일일이 다 따져서 하나님께 요구하면 얼마나 구차합니까? 이미 주신 구원, 영생에 대한 약속만으로도 그 어떠한 것과 바꿀 수 없는데....
주님은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실 때, 그 분이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살아가시면서 가르쳐 주신 삶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은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유 없습니다. 사랑해서 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삶일진대 자꾸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구차하게 이것저것 따지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아쉽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 분께 순종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려움이 와도 그냥 따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와 많은 순교자들....그들은 어려운 선택을 했지만, 그 뒤에 주어지는 영광의 날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영이 세상은 잠시 사는 것이고,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영광을 위해 그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중요한 것을 이해하면서 오늘 우리가 구차하게 신앙생활 했던 것이 있다면, 오늘 말씀에 나오느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우리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한인들, 인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 주신 사명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구차해 지기도 하는데, 주님, 우리가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시되,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필요만 채우려는 모습을 내려 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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