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8일 부활주일 이사야 11:1-9 부활의 약속과 참 증인의 삶
매년 겪는 사순절과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이지만, 매년마다 하나님이 귀하게 축복해 주심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회도 드렸습니다. 새벽 5시에 차를 출발하면 간혹 개들이 차에 달려들어 공격도 하지만, 처음에만 한 두 번 그러더니 요즘은 평안합니다. 새벽기도회를 성도들과 마치고 7시가 되어서 밝은 해가 교육관 예배당을 뚫고 들어오면 얼마나 큰 평안이 있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의 기도제목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기도하고, 성도들이 새벽에 나오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금식, 인도이기에 이 더운 날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평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을 가졌고, 힘든 각 가정과 개인의 기도제목들을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분들의 금식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말씀 속에서 더욱 깊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고, 우리 교회의 나아갈 방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사역들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고난 받으신 시간들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 주고, 그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을 우리 예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주님이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주신 기쁨의 날입니다. 이 날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이 부활의 날이 있기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역사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절 사실인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가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임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예고와 이루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과거에 말씀되어진 것을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졌는데,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고 소개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이 고난과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요 19:31-34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마지막 죽으시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실천되어짐을 보여 줍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조차도 오래전에 예언이 된 내용이였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요 19:36,37을 보면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
성경 자체의 주석을 보며오늘 일어난 이 사건은 시 22:18, 시69:21, 출애굽기 12:46, 민 9:12, 시 34:20에 이미 예언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인 시편 34:20을 보면 “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함과 같이 예언이 되어 있고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분석한 트루만 데이비스라는 의사는 이 십자가 형은 질식사를 유도하는 형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의 근육에 18cm나 되는 큰 못을 박으면, 근육에 큰 충격이 이어지고, 가슴의 횡경막 근육이 숨을 들이신 상태에서 멈춰서 숨을 들이쉬지 못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숨을 한 번 쉬어도 너무나 힘든데, 이 때 가슴의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발목을 들었다 놨다를 간신히 하면서 반복해야 숨이 막힘을 면할 수 있는데, 당시 로마 군인들은 사형수를 빨리 죽이는 방법으로 그 다리뼈를 나무망치로 내리쳐서 부러뜨립니다. 그러면 그나마 한숨을 쉬기 위해 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금새 죽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죽음이 후에 안식일이 거룩하기에 시체를 달아두는 것을 금하기 위해 율법을 쫓아서 이 시체들을 치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이 빨리 죽이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한 강도의 다리를 부셔뜨리고 꺽었는데, 예수님의 상처를 보니 이렇게 까지 할 필요없이 너무 많이 맞으셔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리뼈를 꺽지 않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사실에 대한 예언이 이미 성경곳곳에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모습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도 예언으로 성취되었고,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약속들을 살펴보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사야 11:1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나실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해 주었고, 실제로 그 모든 것이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이 이새의 줄기를 이야기 했을 당시 이 이새의 가문은 명성을 잃고 재난만 당할 뿐 뛰어난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편 ‘싹’ 이라든지, ‘가지’라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이 이새의 줄기에서 결실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가 되어집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성취되는 예언은 분명하게 지켜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이사야 11장 6절부터 이야기 해 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 해 주신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이 소개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11:6-8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질서와는 다릅니다. 뭐가 다른지 우리가 분명히 꿰뚫고 봐야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평화와 화해“라는 주제로 접근되어집니다. 사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사자와 소는 완전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먹히고, 먹는 대칭구조입니다. 이 구조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평화롭게 공존 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소개해 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에 평화의 공존이다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 주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부활절에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계속 되어졌던 문제점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한인교회 역사 29년 만에 한인교회 연합예배가 교역자들끼리 마음을 합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나, 한국은 이번해에는 부활절 연합예배 조차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는 반쪽자리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문제가 되고 고장난 부분은 바로 낮아지려는 마음보다는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그 모든 것이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위 “기득권”을 가져야 모든 것이 유리하고 힘이 주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득권이라는 뜻은 “특정한 자연인이나 법인(法人)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획득한 법률상의 권리. 주로 개인의 재산권(財産權)과 관련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좀 더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누군가 먼저와서 권리를 차지하고 우위를 점령한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했기에 다음 사람들이 오면 괜히 시비를 걸고, 새로 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제시된 동물들의 한 부분은 이리,표범,사자는 동물의 세계에서 힘의 우위를 점령한 기득권들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린양,송아지,살진 짐승은 기득권에게 항상 눈치를 보아야 하는 대상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삶의 자세가 기득권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 많은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 했습니다. 간혹 신문을 보면 목회자들의 모임 같은 조직들이 쭉 나오는데, 회장자리를 보면, 대표회장, 공동회장, 직전회장, 명예회장, 수석회장으로 나눠어 있고, 이것이 부회장, 총무, 서기,회계까지 내려오면서 한 50여명의 목회자들이 임원이 되어서 신문 한면을 다 채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목사’라는 하나의 귀중한 타이틀이 영향력이 없었는지, 어디 회장, 어디 박사, 어디 이사장 등이 같이 붙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기독교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좋은 인재도 많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도 많고,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주시는 분이 많아서 좋지만, 이렇게 조직화되고, 이것이 세력화되어서 이것으로 어떤 힘을 나타내려고 하는 기득권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면서 한국교회는 힘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힘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것은 최근 목회자 뿐만 아니라 장로님 조직까지도 같이 이어집니다. 장로님들의 조직과 모임들도 점점 비슷하게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 뭔가를 맡으면 물론 적어도 하나의 일을 하겠고, 잘 뭉치고 협력하겠다는 마음은 있겠지만, 본질을 벗어나서 뭔가의 과시세력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문제가 됩니다. 어느새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를 기득권을 향한 종교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전달이 됩니다. 제가 부천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 앞 마당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서로 누가 크냐는 논쟁이 났습니다. 장로님 아들이 “우리 아빠가 교회에서 얼마나 일 많이 하는 줄 알아?” 라고 했더니 담임목사님 아들이 “니네 아빠는 교회 차 없지, 우리는 교회에서 차 준다”, 부목사님 아들이 “야 근데 니네 아빠차 우리 아빠 차 보다 작지, 우리 니네 아빠 차는 5명 밖에 못타지 우리 아빠차는 12명 탄다” 그랬더니 관리집사님 아들이 “우리 아빠 차는 45명 타는데...” 아이들도 기득권 싸움이 심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가장 크신 기득권자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다라 올수 없는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가장 큰 기득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모함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잘못된 기득권이 영향력을 주면, 자신을 구하러 이 땅에 오신 메시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놓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시의 기득권자들은 그로인해 부활의 약속을 받지 못하는 저주 받는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지고 맙니다.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가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잘못된 기득권을 우리가 분별하여 피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기초적인 마음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마음을 잃어버려서 그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높은 기득권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기득권을 누리고 이용하여 사람들을 누르지 않고, 그 기득권을 가지고 아주 겸손하게 섬겨 주셨습니다. 진정한 기득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기득권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어떤 지역이나 장소가 기관에서 오래 생기면 우리도 기득권이 생깁니다. 그 기득권을 아주 잘 사용하면 매우 유용합니다. 지구촌 교회의 선교위원장을 하셨던 집사님은 의사였습니다. 무릎관절이 닳아 없어지는 부분에 특별한 뭔가를 개발해서 이 특허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 FDA까지 승인을 받으면 엄청난 경제적 가치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기 사업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자기의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선교회를 만들고,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사실 그 일에 적임자로 저희 교회에서 저를 위해 잠시 미국에서 그 집사님 가정을 만났었습니다. 그 분만 만난게 아니라 그 분 주위의 분들이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을 들었는데, 그분은 의학자, 사업자, 선교 활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워싱턴 정계에 뭔가를 연결하기 위해 아주 폭넓게 영향을 가지신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이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꽤 성공했고, 그 영향력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넓은 실세였는데, 소위 기득권이 있음에도 주님을 위해서 정말 겸손히 사용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저도 직접 경험하면서, 정말 실력있고, 가지고 있는 분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하게 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득권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말 남들이 쉽게 섬기지 못하는 일에는 선뜻 나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겸손히 내려 놓는 모습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부터는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떵떵거리고 예수님의 첫째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던 사람들은 모두 없었고, 예수님이 죽은 그 형장에서 그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요 19:38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유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였으면서 아주 부자였다고 소개를 해 줍니다. 그는 아무도 나서지 못했던 예수님의 죽음의 상황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을 달라고 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묘소를 제공했습니다. 요한복음 19:39에는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그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이였는데, 계속적으로 나오는 이 산혜드린 이라는 것은 71명으로 구성된 당시의 제사장, 종교지도자 등으로 구성된 최고의 중앙재판소를 의미합니다. 사실 그런면에서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최고의 기득권자들이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평소에는 숨어 있는 존재로 나타나지만, 예수님을 위해 결정적으로 역할을 해야 할 때는 자신의 기득권을 잘 사용해서 예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진짜 갖추어야 하는 힘은 없고, 오로지 직분과 명함에 나타나는 자기를 나타내는 위치가 아니라 진정으로 섬기고, 사람들을 이끄는 진정한 기득권자의 모습을 원하시고, 주님 자신이 최고의 기득권자이시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영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힘이 잇든 없든 서로 공존하고, 평화하고 상생하는 평화의 나라를 우리에게 소개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잃거나 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병들게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병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바르게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성경 사동행전에는 “바나바”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언급된 바나바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였고, 초대교회에 아주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충분한 기득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이라는 그 당시에 교회를 대적하고 방해했던 그의 회심을 인정하고, 바울이라는 사람을 초대교회의 기득권에 소개하고, 교회가 그를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기억하지만, 바나바는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자신의 기득권이 무시 된다고 바울을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우를 갖추고 잘 섬겼습니다. 만약 바나바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바울이라는 신약성경의 주요인물이 나오지 못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한 기득권을 가지고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필요하지만, 잘못된 기득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서 어떤 기득권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공동체로 부활의 증인의 소명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님 믿기전의 살기등등한 바울을 교회 공동체에 잘 연결해 준 바나바처럼, 인도 지역에 나온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잘 이끌어야 합니다. 인도에 오니 정말 살기 등등한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다들 보통은 아니였습니다. 다들 화려한 경력과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바나바와 같은 모습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표범과 이리가 되고, 사자가 되어서 그러한 사람들을 쫓아내서는 안됩니다. 가뜩이나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가 으르렁거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의 주님의 증인으로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제자로, 공동체로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잘못된 기득권이 자리잡지 않고 오직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의 이름을 감추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잘못된 기득권의 파괴적인 모습이 반복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기는 공동체로 인도 땅에서 주신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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