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1일 히브리서 13:1-2, 손님을 대접하는 자의 축복
일본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에서 공항으로 차가 마중이 나왔는데, 롤스로이드라는 차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2002년 당시 차량의 가격이 3억5천만원이라고 했습니다. 타이어 하나에 1,000만원 정도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이 차의 주인은 당뇨가 있어서 될 수있는대로 많이 걸어야 된다는 판단을 받아서, 이 차는 주로 교회의 손님을 접대할 때 주로 사용된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 분이 식사 대접을 하는데, 정말 일본에서 보기 힘들고 드문 요리들이 나왔습니다. 일본은 장인정신을 요리와 접목해서 그런지, 음식에 예술적인 가교를 더해서 아주 예술적인 음식들이 나왔고, 그 음식마다 의미가 있고, 정말 하나 하나가 나올 때마다 감탄사가 멈추지를 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먹고 나올 때 또 놀랐습니다. 가격표에 나온 요금이 4인 기준으로 8만엔, 우리나라돈으로 80만원 정도가 되는 음식값이 나왔습니다. 당시에 돈까스 하나가 500엔,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 정도 였다면, 4명이 식사를 하는데 160명분의 식사를 해 버린 것입니다. 2002년이면 지금부터 10년전인데, 엄청난 비용의 식사였고, 대접을 받았습니다.
베트남에서도 사역을 하는데 시골 마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순회했는데, 아주 특별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베트남도 배탈이 많이나서 팀들이 먹는데 고생을 하고 힘들어 했는데, 산골 시골 마을교회에서 ‘개’를 잡아서 우리들에게 요리를 해 주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개를 먹게 될 줄을.....남자들도 엄청 잘 먹었고, 자매들의 경우에도 모른척하고 엄청 많이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도에 있으니 많은 분들이 해야 하는 일중에 하나가 ‘대접’하는 일입니다. 어디로 모시고 가야할지, 그리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 처음에는 참 망설여집니다. 지난번에 한 모임을 갔었는데, 북쪽 어디라고만 이야기를 해 주시고,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아기 돼지 바베큐였습니다. 인도에서는 돼지 고기요리 먹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도 숮불로 구웠고, 덩어리채 들고 먹게 되어서, 그것도 아기 돼지의 연한 살을 맛볼 수 있어서 오래 기억이 남았습니다.
(제가 그 분께 잘 이야기를 해서 우리교회 교우들과도 한 번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삶의 문화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대접하는 문화”입니다. 이 대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충하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되고, 적당히 하면 내가 마음이 편치 않고, 선을 넘어서 대접을 하면 뇌물이 되고, 위험한 상태까지 가게 되어집니다. 회사의 일을 함에도 이 접대비가 중요하게 차지하는 부분이 많아서 회사마다 한도액을 정해 놓기도 하고, 이에 대한 증빙에 대한 규정을 정해 놓았고, 최근에는 항목에도 변화가 생겨서 식사만이 아니라, 문화접대비와 같은 항목도 생기고, 식사의 경우에는 얼마선까지라고 정해 놓는 규정도 만들어 놓는 일이 오래전부터 시작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약간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이게 사적인 접대인지, 공적인 접대인지 구분이 명확하게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괜히 나중에 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접하고 접대하는 문화는 계속되어질 전망입니다.
성경도 이 대접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좀 놀랐습니다. 교회면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같은 단어가 어울리지, 이렇게 ‘대접’한다든지, 남을 ‘접대’한다든지 하는 것은 기독교와는 좀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이 대접하는 일에 대한 성경적인 언급도 많고, 주변에서 이 대접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히브리서 13:2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마태복음 7:12에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디도서 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디모데전서 3:2에도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마태복음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디모데전서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하며, 성경 곳곳에 이 대접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되어 곳곳에서 이야기가 되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도 이 대접하는 일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2장을 중심으로 보면, 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는 이 ‘형제애’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짓밟혀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 시기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매우 위험한 일을 자처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살아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이어나갔는데, 크게 두가지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단자 수색의 위험이였습니다.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은 늘 모임안에서 이단자와 배신자를 수색해서 제거하려는 생존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늘 모임이 날카로웠습니다.
같이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주의 성찬을 해도 항상 언젠가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마음 한구석의 감정으로 형제를 깊이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우리를 고소할지 모르고 그러면 죽음의 위협에 가족이 내몰리게 되기에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둘째의 위험은 이러한 적의에 가득찬 이교도들 가운데에 믿음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을 지켜나가고, 때로는 이것이 순교로까지 이어졌기에, 교인들이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나는 이 정도에서 믿음을 지키는데 너는 이것도 못하냐라고 하면서 정죄하고, 비난하고, 믿음이 적은 자들을 비겁하다고 보기도 했고, 용기가 없다고 하면서 무시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안에는 정말 사랑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교회의 분위기 가운데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형제애”이고 이를 구체화한 것이 바로 히브리서 12:2에 나오는 것과 같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존중할 만한 일로 여겨지는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결과를 초래하고자 세상에서 축복받을 것이 여섯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가 손님을 대접하고, 병자를 방문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여인숙이라는 것은 흔치도 않아서 당시의 문화에는 “빈객교제”라는 잠재적인 통례가 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상호 숙박 시설을 제공해 주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였습니다. 특별히 이와 같은 접대는 크리스찬 사이에 매우 필요했던 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돌아갈 집이 없던 노예, 순회하는 설교자, 예언자, 야행중에 있는 신자들이 많던 당시에는 기독교라고 했을 때에는 “따뜻하게 사람을 맞이해 주는 종교다”라는 평을 나중에는 받게 되어집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해서 이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이교도들 가운데 아리스티데스라는 사람은 “만일 동료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투옥된다든지 고난을 받는 경우에는 그들은 모든 수단을 써서 그 사람을 필요한 대로 원조하고 돈으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라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옥중에 있는 동료들을 돕는 일이 너무나도 빈번해져서 4세기 초반에 리키니우스 황제는 “옥중에 있는 죄수에게 음식물을 보낸다든지, 친절을 보인다든지, 굶주리고 있는 자를 위해 은총을 베풀어서는 안된다”라고 아예 법률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이 사랑의 교제를 막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오늘 히브리서에 나온대로 형제애를 발휘하여 함께 삶을 공유하고,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며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당시의 사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곳 인도에서 가져야 하는 중요한 믿는 자의 자세를 하나 배우게 됩니다. 우리도 이곳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손님 접대를 잘하라”라는 이 말씀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으로 잘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곳 인도는 먹고, 자는 것이 외국인에게 참 힘든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손님을 접대하려면 내가 부담을 많이져야 합니다. 손해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더 잘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대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우를 한다는 소리입니다. 예우를 갖추어서 상대방에게 배려해 주면서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스타일로 좋아하는대로 하는 대접이 아니라 상대방이 정말 필요로 하는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 대접입니다.
아직 여러분께는 소개를 안했는데 제가 전에 섬기던 경성교회라는 곳에서 청년부 회장을 하던 형제가 이곳 인도에 저보다 먼저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시 인도로 오게 되자 그 형제님을 이곳 인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제가 처음에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생수와 핸드폰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공항 통과하시느라고 속타시고 애타셨죠, 물 드세요..그리고 인도는 연락이 중요해서 이 전화기 임시로 준비해 온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쓰세요....” 이 두 가지가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그후에도 자기의 숙소의 방을 내어주면서 우리가 구르가온에 집을 얻을 때까지 자기의 방을 비워서 재워주고, 공항 오고가는 것부터 해서 얼마나 정성껏 섬겨 주었는지 모릅니다. 인도 초기의 중요한 정보는 대부분 그 형제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일 힘들 때 받은 사랑과 섬김이라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 13:2에는 이 손님접대를 통해서 받은 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손님 접대를 잊지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내용이 창세기 18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 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라고 했습니다. 평소의 모습대로 정성껏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가는 천사였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천사인 줄 알고 대접한 것이 아니지만, 대접한 그들이 천사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영적인 비밀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대접하며 서로를 섬기는 것이 신앙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에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대접 받는게 좋더니 시간이 좀 지나니까 대접을 하는게 더 좋았습니다. 전임전도사 시절에 대학원 공부를 하는데 장학금을 받았는데 간혹 등록금보다 남은 금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남은 액수를 고민하다가 제가 섬겼던 중학생 아이가 형편이 어려워져서 교복 구입하기도 어려웠고, 참고서도 구입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저희 가정에서 장학금을 또 만들어서 그 아이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 가정이 너무나 절박해서 그 적은 돈도 귀하게 받아 주셨습니다. 그런데요...받을 때 보다 줄 때가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남을 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게 된 순간이였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35을 보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또 한 번 기도합니다.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 “교인들은 손님대접하기를 잘한다” 라고 주님께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이게 거꾸로 되면 “델리한인장로교회 교인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해”가 되는데 이러면 큰 일 납니다. 대접을 많이 받기만 하면 어린 신앙입니다. 어른 신앙 성숙한 신앙은 대접해야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이 마음을 가지면 정말 대접하고 섬길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직 인도 정착을 잘 못한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간혹 교회 나오라는 식으로 돕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이 인도에 와서 생활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초기에 먼저 온 사람으로서 정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합니까? 그냥 이 일은 정말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괜히 먼저 왔다는 기득권적인 의식을 가지고 내가 정착 정보 주었으니 ‘교회 나와라’ 이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말 없이 섬겨 주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때로는 이것을 역으로도 이용합니다. 우리에게 정착 정보를 주면 교회에 나가 주겠다.....이런 분 있어도 그냥 속아주고 가서 그냥 도와 주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선교사님들도 많습니다. 정말 힘들게 일하시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선교사님들 가운데 가정을 가진 선교사님들도 있지만, 가정이 없거나 지지기반이 약한 청년선교사님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사역을 돕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우리가 이런 분들을 잘 대접하고, 섬기는 기회는 언제든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부담스러울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뒤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지난번에 선교사님들이 자녀가 한국에 들어가서 아이들이 공부할 책과 화물을 보내야 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애를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전트립팀과 교제의 기회를 만들고, 그 분의 짐이 박스 7개가 나왔는데, 빈짐으로 가는 비전트립팀이 너무나도 기쁘게 그 짐들을 다 가지고 가서 한국에서 붙여 주었습니다. 잘 도착을 해서 아이들이 잘 받고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사랑하면 일이 보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먹지 않고, 강팍해지면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성도들간에도 서로를 사랑하면 일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만 보입니다. 그러면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명령을 받아 이 사랑의 섬김을 이곳에서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인도 사람을 섬기는 일도 방식과 방법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마가복음 14:25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번 주 설교의 시작을 만들어 준 본문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주석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나신 후에 이 말씀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만찬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다는 말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를 맞아 주시기 위해 귀한 식탁을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이 준비한 식탁에 앉을 때 이 땅에서의 귀한 섬김과 대접의 이야기를 풍성히 만들어서 그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도 대접만 받다가 천국에 가서도 주님께 대접 받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전자가 되어서 주님이 여러분을 극진히 대접하며, 여러분을 칭찬하는 그 시간이 이 인도에서 풍성히 쌓여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달려 다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사랑을 받고 또 천국에 가서도 대접만 받으면 얼마나 민망합니까? 그래도 열심히 사랑하고 섬기고 대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예수님과 만찬을 해도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삶의 현장을 늘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고 새기기를 원합니다.히브리서 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이 말씀대로 섬김을 통한 귀한 축복들이 이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이 알려 주신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며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고 주님을 섬기는 귀한 축복을 인도에서 경험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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