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네 집 이야기(또 다른 탕자) 눅 15:11-32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서 소개하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도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다른 곳으로 가서 다 써버리고 탕진하고, 남의 집에서 더러운 돼지를 치우고, 돼지가 먹는 그 사료를 먹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셨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우리가 좀 더 깊이 이해하면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탕자를 보는 다양한 입장
첫째. 청년사업가로서의 탕자
오늘 본문에 보면 탕자는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누가복음 15:12을 보면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보통 부모가 죽은 뒤에 자녀에게 남겨질 유산을 이야기 하는데, 죽지도 않은 부모에게 감히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좀 재미있는 몇 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재산을 받은 탕자가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라고 했습니다. 기존에 하던 집안일을 뒤로하고 먼 나라까지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갔다면, 반드시 이유가 몇 가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보를 듣고 거기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위 ‘대박’의 꿈을 가지고 달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뭔가 아주 확실한 것이 있기에 무리수를 두고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먼 나라까지 간다는 것은 무언가의 기대를 가지고 간 것일 것입니다. 아마 인도에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인도 경제의 통계를 보고 무작정 뛰어들었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일 것입니다. 어느 단체에서 인도에서의 사업설명회를 한다고 해서 내용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다 될 것 같지만 인도에서는 아직 어렵습니다”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 주어서 좀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통계와 전해들은 말과 실제는 다릅니다. 인도에 와서보니 먼지가 많아서 그 모래 먼지가 집안에 쌓여 전기 청소기가 아주 꼭 필요할 줄 알고, 그리고 잘 팔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집집마다 청소하는 메이드를 두고 일을 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어서 전기청소기가 필요없었습니다. 차 역시 먼지가 많아서 세차장을 있겠지 싶었는데 잘 찾기 어렵습니다. 알고 보니 세차를 하는 노동력이 너무 싸서 오히려 그것이 더 잘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탕자도 일확천금을 꿈꾸고 먼 나라로 갔지만, 원하는 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먼 나라는 어떻습니까? 법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언어도 다릅니다. 사람이 익숙한 곳을 떠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그 돈을 빼앗을까를 생각하고 항상 그를 속였을 것입니다. 경영에 대한 경험도 없던 그가 그러한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택한 것은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쾌락입니다. 그 쾌락은 법칙이 있어서 돈을 많이 쓰고, 강도를 높일수록 짜릿합니다. 그 끝을 스스로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결국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탕자를 바보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야망을 품고 무리수를 두다가 언제든지 탕자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탕자가 탕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실패를 딛고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공에 대한 기대는 컷지만 실패에 대한 견딤을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꿈꾸고 제각기 자기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지만 실패의 쓴 맛을 견디지 못해 탕자처럼 쾌락에 빠져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라고만 장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어쩌면 탕자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인도에서 일하다가 힘들고 어렵고 배신감 느끼면 우리도 탕자처럼 쾌락을 쫓아서 나갈 수 있습니다. 탕자에게만 손가락질하고 어리석다고 우습게 볼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탕자를 기대한 아버지
탕자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고 먼나라까지 가서 아버지의 재산으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가 아닌 둘째이기에 거기에서 오는 차별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있습니다.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형을 넘어서고 싶은 마음, 특별히 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살아갈 때 상대적으로 막내인 자신은 항상 어린아이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언젠가는 한 번 형을 이겨보는게 소원입니다. 형보다 뭔가를 더 잘하는게 소원입니다. 막내들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가 형하고 자기하고 입장 바꾸기입니다. 형이 동생으로, 동생이 형으로 그 역할을 하는 놀이입니다. 아주 좋아합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동생 야곱이 아주 빼앗아버립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오늘 탕자는 일단은 그 형을 두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상속받고 며칠안에 갔다는 것은 아마 미리 계획된 일 일것입니다. 익숙한 곳을 갑자기 떠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탕자도 처음부터 재산을 다 잊어버릴 각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탕자에게 재산을 준 아버지는 성경의 내용을 보면 꽤 돈을 모은 사람입니다. 돈을 모우고 안정되게 관리를 하는 사람은 뭔가의 성공의 요소가 있습니다. 재산관리를 어느 정도 잘 한 성공한 사람이였습니다. 이러한 탕자의 아버지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재산을 아들에게 쉽게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되어서 얼마 안되는 아이들 용돈을 줄 때도 사실 손이 떨립니다. 많이 주자니 경제관념이 없어질 것 같고, 구지 용돈은 안줘도 이것저것 다 해주는데 뭐 필요가 있나, 그래도 스스로 돈을 써보는 경험을 통해 경제관을 형성하는게 좋다고 생각을 하고 주기는 하는데, 용돈을 주면 아껴 쓰거나 감사하고 쓰는게 아니라 하루에 장난감 하나 퍽 사고 나면 괜히 약이 오릅니다. 돈 액수가 아까운게 아니라 배신감이 듭니다. 탕자의 아버지도 그 정도의 판단은 하지 않았을까요? 자기 아들의 성품을 잘 알고, 돈을 주면 이 아이가 어떻게 할지를 잘 알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상당히 큰 금액을 선뜻 준 것은 어쩌면 탕자의 사업 계획이 타당했기 때문에, 기대를 하고 주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간혹 이렇지 않습니까? 꼭 성공할 것 같고, 내가 뭔가를 확 뒤집을 것 같고, 세상을 다 잡을 것 같은 자세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지 다 설득을 할 수 있고, 내가 마음대로 다 휘잡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탕자를 무능력한 재산 탕진가로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똑같이 탕자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할 줄 알았는데, 잘 되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쉽지가 않았습니다.
2. 탕자네집 이야기 두 번째로 큰 아들이야기입니다.
사실 탕자네집 이야기에서 이 큰 아들의 내용은 감추어진 것이 많습니다. 연극으로 할 때 탕자가 주연급이고, 이 큰 아들은 조연급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역할이나 대사는 별로 없어도 사실 아주 중요한 복선을 깔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무리하게 재산을 요구할 때 이 큰아들은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그냥 가만 있어도 유대인의 법에는 장자에게는 2/3의 재산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계속 늘려서 나중에 2/3를 안정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받는게 자기의 계산에는 쉽고 편한 방법이였습니다. 이미 확보된 것이기에 그렇게 애를 쓸 필요도 없고, 그냥 자기의 몫만 잘하면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복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동생의 무리한 요구를 보면서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자기 밑에서 1/3 정도의 재산만 고정적으로 받든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나누면 별로 머리 아플일도 없는데, 이것을 나누어가서 먼 나라에 가서 사업을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당당히 집을 나서는 탕자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을 것입니다. “정말 내 동생은 자유하는 영혼이다.” 저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인생을 사는걸 보니 부럽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님의 직업이라도 자녀 세대에서 100% 만족하며 부모님의 일을 이어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은 대원외고를 거의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국 모의고사 전체 1등도 여러번을 했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왔습니다. 친구들이 다 검사 변호사로 일하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일을 돕느라 대리석을 짜르는 회사의 전무라는 직위로 일을 합니다. 돈도 잘 벌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본인은 그 일이 항상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돕는거지,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장남은 장남으로서의 압박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 성경에 나온 장남은 역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의 일에 충실하게 일을 합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위해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 장남이 보여 주는 반응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집을 나가서 정말 죽을 고생을 다하고 돌아오는 동생에게 보인 반응은 아버지와는 너무 대조가 됩니다. 탕자를 위해 잘못된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준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남은 매우 신경질적이였습니다. 눅 15:28을 보면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15:29을 보면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여러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눅 15:32에 보면 “내 동생”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이 아들”이라는 말로서 남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좀 무섭습니다.
사실 탕자도 잘못되었지만,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장남이 더 심한 탕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늘 아버지 곁에 있어서 그 사랑을 받았지만, 그 마음은 더 썪어 뭉그러져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이렇게 분을 내는 이유는 이제 이렇게 탕자가 다시 다 잃어버리고 돌아왔으니,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서 탕자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이고, 그러러면 자신에게 확정되어 있는 재산중의 일부를 또 분명히 탕자를 위해 사용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탕자에게 이제 입히고 먹일 돈이 들어갈 것이니 이 역시 자신의 소유가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게다 이렇게 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보니, 이제껏 자기는 자기 뜻 한번 펴보지 못하고 일한 것이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섞은 자는 바로 탕자보다도 이 장남이였습니다.
오늘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나의 목적과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에 분노하거나,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고, 분노를 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먼저 믿었다는 것, 오래 믿었다는 것이 기득권이 되어 편안하고 안정되게 늘 자신의 자리가 유지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새로운 성도들이 오거나, 전도되어서 오는 사람이 있어서 사람들의 반응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쏠리면 마음속에서 괴로워합니다. 이 마음은 어른이나 청소년들이나 아이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래서 괜히 심통을 부립니다. 청소년들은 자기에게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시큰둥해집니다. 어른들은 앞에서는 잘 하지만, 뒤를 돌아서면 흠집을 냅니다.
군대는 새로운 신병이 입대를 하면 후견이 제도를 둡니다. 그가 부대에 잘 자랄 때까지 그 선임병이 가르쳐 주고 잘 가르쳐 줍니다. 지금은 군에서 구타가 없어졌지만, 제가 군생활 할 때는 구타가 있었습니다. 정말 살벌합니다. 그런데도 그 험악한 구타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절대로 이등병이나 신병은 안 때립니다. 군대생활 6개월 정도 하고 알만할 때부터 때리고, 신병이 잘못을 하면 그 후견인이나, 선임병을 때립니다. 신병은 자기가 잘못을 해도 자기가 직접 맞지 않고 자신의 고참이나 부대원들이 자기 때문에 잘못을 책임지고 벌을 받거나 맞는 모습을 보면서 더 정신을 차립니다. 여러분 군대도 이런데,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군대보다 못하면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 장남을 이야기 하시면서 직접 화법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간접 화법으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을 꼬집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세리와 죄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는데, 오히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장남처럼 겉으로는 아버지를 따르듯이 하나님을 따르지만, 그 마음의 진정한 내면에는 하나님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기득권을 통해서 얻는 사람들로부터의 관심과 기득권으로서 얻는 이익에만 목적을 두었습니다. 장남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가 자기 곁에 계신 아버지를 제대로 못 본 것 같이 자신들의 죄를 지고 부활하실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못 본 것입니다. 탕자는 비참한 생활을 통해 오히려 돌이켜 아버지를 보고 달려왔지만, 장남은 아버지를 제대로 못 본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교회에도 늘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지만, 아버지를 못 보고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모든 종교적인 활동은 하지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고, 장남처럼 자기 책임만 다했다고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늘 맴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늘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특권과 감사로 자신의 하루 하루,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동행을 하며 그 분의 뜻을 이루는데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계산하고 살았던 장남처럼, 내게 돌아올 축복만을 계산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셋째는 탕자네 집 이야기의 세 번째 사람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집안이 이렇게 갈등이 있는 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책임이 큽니다. 아버지로서 제대로 했다면 원칙적으로 재산을 미리 나눠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받은 유산으로 며칠이 못 되어 먼 나라로 갈 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어느 정도 방어막을 쳐 놓고 보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기에 자신의 유산으로 충분히 이렇게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탕자도 무조건 받아주는게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다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장남의 불손한 태도도 “죽었을줄 알았던 네 동생이 살아왔는데 너 지금 그 자세가 뭐야, 늘 네 옆에서 배운게 그거 밖에 안돼...?” 라고 다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푸는 것을 율법으로 풀지 않고 사랑으로 풀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로채서 타국에서 다 탕진한 아들이지만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눅 15:30에 보면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고 하는데 원문을 보면 그 살찐 송아지 앞에 (톤)이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관사의 성격이 특정한 것을 지칭할 때 붙는 것임을 감안할 때, 아무 송아지가 아니라, 아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특별히 준비된 송아지를 미리 준비해 놓은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소고기 요리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요리가 난지 6개월만에 잡은 송아지 스테이크는 최고급 요리입니다. 보통 한국의 워커힐이나, 힐튼의 저녁식사가 70,000원선이면 이 송아지 스테이크가 포함된 코스요리는 220,000원 정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송아지 요리는 좀 잔인합니다. 이 요리에 쓰이는 송아지는 젖소 농장에서 태어난 숫송아지들입니다. 이들은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겨 고기가 질기다고 박스같은 작은 우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키웁니다. 그리고 철분이 많으면 고기의 맛을 변질시킨다고 송아지가 먹어야 할 철분을 못 먹게 합니다. 철분을 못 섭취하니 빈혈이 됩니다. 아마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당시에도 이 송아지는 따로 구별하여 키우는 특별 요리를 위한 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올 아들을 위해 자신이 준비해 줄 수 있는 최고급 요리를 항상 생각해 두었습니다. 그 송아지를 지나칠 때마다 탕자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탕자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에게는 분명 자기가 지어준 그 이름으로 그 탕자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은 탕자라고 부르지만, 우리 주님은 탕자가 아닌 우리의 이름을 분명히 부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버린 받은 이름이지만, 우리 주님께는 잃어버린 소중한 영혼입니다.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실 만큼의 값 비싼 댓가를 치루고 얻으신 소중한 영혼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안에서는 탕자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탕자같은 모습을 가지고 교회에 와도 탕자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요1:12에 나온대로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눅 15:22을 보면 “아버지는 그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좋은 옷'(스토렌텐 프로텐)이란 잔치나 연회 때 입는 가장 아름다운 의복을 가리킵니다. 손에 '가락지'는 부와 위엄을 의미하는 표시로, 그 당시 손에 가락지를 끼워준다는 것은 총애를 나타내는 구체적 표현입니다. 총애를 받는 아들로 그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편 '발에 신을 신기라'는 그 시대의 종이나 노예들은 전혀 신을 신지 못한 것을 통해 탕자가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위로해 주는 상징적인 표시였습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섬세하게 사랑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 섬세한 사랑을 우리가 항상 놓치지 않고 깊이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큽니다.
둘째는 장남을 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눅 15:28을 보면 노한 장남에게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권한대’라는 말은 ‘파레칼레이’라는 단어로 미완료시제입니다. 이 말은 완료형이 아니라 계속해서 권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큰 아들에게 확 소리를 지르면서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장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계속해서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눅 15:31을 보면 “ 애 너는 나와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권합니다. 장남이 가진 재산 손실에 대한 우려와 염려를 이해하도록 설득합니다. 그러면서 장남의 마음이 삐뚤어지지 않게 품어줍니다. 인내하고 참아주면서 받아주면서 사랑으로 품어 줍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가정의 나중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올해 초에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내용의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동시에 태어난 두 여자아이가 바뀌면서 운명이 바뀌었는데, 그 주제가 낳은 자녀와 기른 자녀에 대한 사랑의 깊이였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 엄마는 참 괴롭습니다. 부자였던 딸을 자신의 가난한 집으로 데려와야 하고, 가난했어도 딸만을 바라보면서 이겨낸 보석 같은 딸을 부자 집에 보내 주어야 하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어느 딸을 더 사랑할 수도 사랑 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괴롭고 힘든 마음으로 찾아오는 낳은 딸과 기른 딸을 항상 변함없이 품어줍니다. 결과적으로 두 딸은 환경이 뒤바꼈지만 품어주는 엄마의 사랑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탕자네집 이야기의 끝은 예수님이 더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품어주는 아버지가 있기에 그 가정은 사랑으로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에 끝을 다 실어주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 숙제로 내어 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우리가 모인 교회가 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안에는 탕자도 있고, 장남도 있습니다. 둘이 있으면 절대로 화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으면, 사랑의 아버지가 있으면 분명히 품을 수 있습니다.
이제 다음주면 성탄절이고, 곧 2011년이 넘어갑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도록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우리는 탕자를 통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을 때 겪는 빈곤......, 아버지하고 늘 같이 있는 것 같지만 장남같이 진정한 사랑을 못보는 또 다른 탕자같이 우리 주위에 겉으로는 잘사는 것 같고, 멋있어 보이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나 어떻게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탕자들을 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장남처럼 자기가 맡은 일만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으시면서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잃어버린 영혼의 소중함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아주 길게 우리에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신 주님께 순종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탕자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지금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가정이 회복되었듯이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늘 느끼며, 체험하며, 감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 내 이름 아시죠...
파송의 인사 : 성탄절...아버지의 사랑을 전하기에 매우 좋은 날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며, 아기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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