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0일, 마가복음 11:8-10,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문화 인류학 수업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문자도 없고, 정말 오지인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산골에서 한 부족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고 복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소개하면 이상하게도 부족 사람들은 표정이 밝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유다를 소개할 때에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나 흥미롭게 여기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장면을 이야기 할 때에는 너무 너무 가롯 유다를 존경하듯이 귀를 기울이는 이 부족이 이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선교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부족은 식인종 부족이라, 서로에게 아주 친절하게 잘 대해 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배신을 해서 동료를 잡아먹는 관습이 있던 부족이라, 이들이 볼 때에는 희생을 당하고,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예수님은 바보 같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버린 가롯 유다가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존경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하기 위해 평소에는 아주 잘 대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먹어치워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참 간사합니다. 잘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아무리 잘해주고, 정이 들었어도 냉정하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상대방을 배신하게 됩니다.
배신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 배신으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이 얼마나 큰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 어마 어마한 길이를 세우느라고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들여서 중국의 진나라가 성을 건축했지만, 그 만리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적이 적에게 매수되어서 배반을 하고 성문을 열어주어서 결국 만리장성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받아 쓸모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배신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아서 그런지 조폭이나 깡패집단에서는 이 배신은 가장 큰 악덕으로 조직폭력배들 사이에서는 배신 자체는 죽음과 맞바꿀 각오를 하라고 하면서, 배신할 경우 오게 될 참혹한 형벌을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무슨 문제가 생겨도 배신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것이고, 만약에 배신을 한다면, 그 어떠한 상황이 와도 배신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배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사역의 마지막 발걸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날입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과 떨어진 곳에서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방 도시들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소문에 소문이 이어지면서, 이제 예수님의 대한 이야기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졌고, 식민통치를 하던 로마정부까지 익히 소문을 들고 있던 상태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이제 곧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 앞에 깔아 길을 만들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하면서, 찬송을 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막 11:8,9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그 어떠한 찬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최고의 찬사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높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로 길을 만들어 환영을 한 것은 “왕” 이라는 것을 의미를 두고 행한 모습이였습니다. 특별히 이 때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는 이스라엘에서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고,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 역시 왕을 맞이할 때 하는 의식중에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이 환영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들의 참된 왕이심을 인정하고, 최대한의 환영의 인사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환영을 했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군중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막 15:11-13을 보면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물론 대제사장들이 유도를 했겠지만, 바로 일주일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을 만들어 환영했던 그 무리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순식간에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무기력해보이면, 필요가 없어 보이면, 예수님처럼, 이제 잡혀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 인간들은 바로 배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얼마나 무거우셨겠습니까?
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들을 구하러 오신다는 그 사명으로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부탁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 주시고, 같이하시고, 동행하시면서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병든 자에게, 소망이 없고, 귀신 들린 자들에도 예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간혹 제자들은 그럼에도 못 미더워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자들이나 따르는 무리들은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면, 이렇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8,9을 보면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도 자신 있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특별히 사역을 하시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되어진 일들을 하나 하나 너무나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치유를 받고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들, 방황했지만,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던 수 많은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어떠한 것과도 다른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를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으라는 소리”에 침묵을 합니다. 길을 막아서서,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라고, 그렇게 중죄를 지고 십자가 형에 달려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에게 성급한 나머지 칼을 들고 예수님을 호위해 보려고는 합니다. 요한복음 18:10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도 금새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겁이 났는지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여자 아이 앞에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래도 나름 리더 그룹에 속했다고 생각하던 베드로도 결국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배반을 합니다. 당시의 로마의 권력과 형벌이 모든 이성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저 침묵하는 정도, 그냥 곁에서 지켜보는 것 이상을 감히 어느 누구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는 더욱 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전에 받은 신세나 사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소개가 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에는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편이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너무 약한 존재입니다.
너무나 쉽게 신의를 저 버립니다. 원칙도 저버립니다. 형제간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부부간에도 신의를 쉽게 저버립니다. 나를 위해 희생해주고, 도와주고 섬겨준 사람의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세상이 험해서 그런지,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도 신의를 저 버립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기에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반당하기를 그 어떤 것보다도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쉽게 배반을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금만 섭섭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이전에 아무리 좋았던 기억이 있어도 배신을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보다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쫓아서 나아갑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소개해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배신한 하나님의 백성을 품어 주시는 이야기로 반복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정말 바보 같이 사랑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오셨을 때, 다시 만난 제자들은 대부분 배신자들입니다.
주님을 다 떠났습니다. 심지어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이 걸어 가셨음에도 예수님이신 줄 모르고 예수님을 등지고 갑니다.
다시 찾은 제자들....주님께 배반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던 그 제자들...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은 자에 대한 많은 생각이 납니다.
아쉬운 생각들, 부족한 모습들..., 죽었지만, 아직 깊게 실감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배반한 제자들에게, 이 “배신자들여” 라고 외쳐되 되실 상황인데, 예수님은 쉽게 쉽게 배반하고, 뒤돌아가고, 예수님을 떠났던 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 28:20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니들은 나를 배신했지만, 나는 절대로 너희를 배신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셔서. 이 지긋지긋한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아도 되실텐데, 이 땅에서의 어려움으로 보상을 받기 위해 이 배신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정서적으로 맞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응하게 하려고 최후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한 번 말씀하시면 변하지 않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너희들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한 번 예수님을 배반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26:35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미 말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이고, 제자들이지만, 이미 깊은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 근처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뭔가 뒤집혀서 죄인으로 고발 당할까봐 출행랑을 쳤습니다. 마가복음 14:50-52을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렇게 맨몸으로까지 도망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이야기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라는 이 주님의 말씀이 들려졌지만, 이전에 장담했던 자신들이 무너진 뒤로 더 이상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늘 주님을 배신한 것이 너무 부끄럽고,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경험한 뒤로는 이전과는 분명하게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자세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전에 배반했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나에게 항상 함께 해 주시겠다는 그 주님 앞에 딱 한 가지 자세로 살았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주신 은혜를 까먹고, 주님을 놓치고 살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배반한 우리를 다시 세워주신 주님 앞에 우리도 이 신앙의 고백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이 고백을 한 제자들은 더 이상의 배반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그 이후의 삶에서 분명하게 주님을 따르는 신의를 지키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도리이고, 이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위해 그 어떤 한 희생을 무릅쓰고도 신의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이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환영했다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그 군중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굳건하게 드리고 나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을 신뢰하며, 나를 또한 배반하지 않으실 주님을 꼭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입니다.
그 주님이 당하신 고통의 시간들을 우리도 새벽기도회와 금식기도회로 조금씩 동참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이 시간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은 체험신앙입니다. 아직은 깊게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런 시간을 통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그 받으신 고난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끼고, 기억하고,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또한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배반하지 않고,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을 붙잡는 고난주간에 주님을 만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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