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요한복음 19:28-30 “끝까지 가셨던 예수님”
페이스 메이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라톤과 같은 경주를 보면 장거리를 달리기 때문에 무척 힘듭니다. 그런데 긴 거리를 혼자 뛰면 무척 지칩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게 곁에서 같이 뛰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의미가 변했습니다. 이 페이스 메이커들은 자기의 속도보다도 좀 더 속도들 높여서 뜁니다. 그러면 금메달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그 페이스 메이커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달립니다. 그런데 이 페이스 메이커들은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가도 마라톤이 42.195km를 뛰어야 하는데, 3/2정도가 되는 30km 정도가 되면 경기를 포기합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는데, 제3세계권의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로 이런 일을 많이 담당한다고 합니다. 1등을 만들기 위한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상업적으로 이렇게 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예 시작부터 끝까지 뛰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이 사람은 선수입니까? 선수가 아닙니까? ( )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끝까지 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애초부터 끝까지 뛸려는 마음이 없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의 경주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잘 뛰는 사람과 못 뛰는 사람은 나뉘어지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의 경주를 위해 완주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위해 끝까지 가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28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어야 함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는 이 십자가 형벌을 피할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고 기도를 하시고, 무려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해서 죽으시는 그 일을 위해 끝까지 달려 가시기가 너무나도 부담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19:28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달려 오셨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힘들고 지친 십자가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담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19:28을 보면, 성경이 성경관주를 소개합니다. 지금 이 요한복음 19:28은시 69:21에서 소개가 되었는데, 시편 69:21을 보면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진 일들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끝가지 가십니다.
요 19:28-30을 보면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라고 기록이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라 이 ‘신 포도주’를 번역하면 ‘식초’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보통 물과 신포도주와 계란으로 만들어졌고, 로마 군인들이 주로 마시던 음료라고 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목말라하시는 예수님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였습니다. 막 14:35,36을 보면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라고 합니다. 해면은 스폰지와 같은 것으로,여기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서 갈대에 메어서 예수님의 입가에 갖다가 댄 것입니다. 이같은 행동은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외치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셨는데, 곁에서 듣던 로마 군병들이 “엘리, 엘리...” 라고 하니, 곁에 섰던 사람들이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가보다 하고, 좀 더 살려두면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뜻에서 나온 조롱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지금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이 죽으니까 무슨 특별한 마술쇼나 기적이 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지켜봅니다. 지금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그저 더욱 잔인하게 예수님을 놀리고, 조롱을 합니다.
(예) 최근 IS들이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는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 같은 일을 당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생명이 철저히 짓밟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일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길을 가십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시는 것이 아닌데, 그것도 가치가 있을만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데,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십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지금 인간의 몸으로 모든 고통을 다 받으시는데, 그 고통이 너무나 크셨습니다. 크게 소리까지 지르실 정도로 너무나 고통스러우셨는데, 그 고통 앞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끝까지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끝까지 가시지 않으셨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 27:33,34에는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몰약 탄 포도주’라고 되어 있는데, 이 몰약과 쓸개는 진정제와 마취제의 작용을 하는 약재입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에게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약재나 아편을 넣은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고통을 받으실 예수님을 걱정한 예수님의 여 제자들이 드렸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이때는 이것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마시면 진정한 고통을 살짝 넘기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끝까지 맛보시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남김없이 마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사명을 담당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적용) 저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중간에서 포기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금만 고통이 오거나 불편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려고 합니다. 앞, 뒤 좌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가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끝까지 가게 하시고, 끝까지 함께 동행해 주심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흘리신 그 수고로 우리의 삶의 길에도 우리가 끝까지 가도록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끝까지 함께 해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삶을 포기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길을 페이스 메이커처럼 중간 정도만 같이 뛰어주고, 뒤로 빠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정말 힘든 시간은 “너가 알아서 잘 뛰어봐라” 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 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는데, 지치거나, 약해졌을 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지금 너무 힘들어요...지쳤어요..저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가 당할 고난을 깊이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저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수 많은 치유와 자비를 베풀었지만,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그 누구도 돕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마저도, 구원자라고 두 손을 들고 환영하던 사람들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 잘못된 것이고,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탄 마귀와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이 세상의 부당한 힘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를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아시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외면하고, 모든 고통을 다 받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말하지 못할 고통이 없고, 주님이 함께 아파하지 못할 고통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와 끝까지 함께 가실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혹시 지금 잘나가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셔도, 여러분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을 때, 예수님은 여러분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시고, 적당하게 있다가 그냥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고통에도 우리와 끝까지 함께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상에서 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뭐길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집니까?
여러분!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으면 잊혀지지가 않듯이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오셔서 도우시는 그 큰 은혜가 우리의 삶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를 부려 먹거나,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도록 내 곁에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해 끝까지 함께 가 주신다는 예수님의 그 약속과 오늘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전이 됩니까?
모두가 나를 떠나도, 우리 예수님이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집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히 12:1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108년의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37km가 끝나서 거의 스타디움이 보이는 시점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브라질의 리마라는 선수를 아일랜드계 관중이 자기의 주장을 사회에 인식 시키기 위해서, 그 대상을 마라톤으로 삼고 1등으로 달리던 리마에게 뛰어 들어서 그를 밀쳐서 넘어 뜨렸습니다. 경기장에서 밀려서 사람들이 있는 관중석까지 크게 밀려 넘어진 리마선수는 다시 일어나서 뛰었습니다. 페이스를 놓쳐서 1등을 따라 잡기는 역 부족이였지만, 그는 3위로 골인을 했었는데, 그는 3위이지만 활짝 웃는 모습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보답을 했었습니다. 이 때 리마의 비행기 세레모니는 역대 가장 아름다운 마라톤 세레모니로 기억이 되어집니다.
(적용) 우리 인생에도 이처럼 열심히 잘 가는데 뜻하지 않은 길로 우리의 길이 어그러질 때가 없습니까? 인도에 발을 담그는 순간이 바로 어그러진 길이였다구요? 아니 누구 때문에 내 길이 엉망이 되었다구요....만약 브라질의 리마 선수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으면 할 말이 무지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변명보다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마라톤을 완주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거기 서서 화를 내고 따질수도 있지만, 그는 먼저 완주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따지고 싶고, 원망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이 안되는 모든 핑계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요...일단은 먼저 주어진 자신의 길을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보다는 끝까지 달린 사람을 세상에서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끝까지 걸어가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끝까지 가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 안되는 일, 따지기 보다는 먼저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완주하여, 끝까지 달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포기 했던 일이나, 상황이 되지 않아서 좌절하고 포기했던 일이 있다면, 따질게 너무 많아서 그것을 하느라고 달리는 일을 잃어 버리신 분이 계시다면, 다시 일어서서 원래 가야할 길을 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또 하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1968년 10월 20일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거의 모든 선수가 다 들어 온 뒤, 모든 조명이 꺼지고 해가 질 무렵에,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난 시간에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아쿠와리라는 선수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경기장 트랙을 돌고 있었습니다. 처음 출발하자마자 스텝이 꼬여서 옆 사람과 부딪쳐서 부상을 당했습니다. 다리는 무리되는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서 붕대를 타고 터진 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결승선에 넘어진 아쿠와리 선수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부상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뛰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My country did not send me to Mexico City to start the race. They sent me to finish." (나의 조국이 나를 멕시코에 보낸 것은 단지 경주를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부상당하고 피가 흐르는 다리를 질질 끌고 42.195 km를 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꼴찌라 창피했을까요? 관객도 없고, 도로와 차선만 남은 상태, 아무도 없는 컴컴한 경기장, 아무도 맞아주지 않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고 일하라고 하실 때에는,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라고, 힘들면 그만 두라고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쿠와리 선수가 그 고통의 시간에 잊지 않고 기억한 고국에 응원을 기억했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응원의 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뛸 수 없는 상태일 때, 우리는 거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그 모든 고통을 먼저 겪으시고, 이제 “너도 할 수 있다” 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결승점을 향해 우리도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 가야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시간이 걸리고, 더디게 일이 진행이 될지라도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화) 인도의 만지히(Dashrath Manjhi)는 1934년 인도 비하르주 인근 겔라우르(Gehlaur)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만난 아내 데비(Phaguni Devi)와 결혼했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일하는 자신에게 점심 식사를 가져다주다 넘어져 크게 다쳐 이웃 마을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 했으나 끝내 치료받지 못하고 1959년 숨을 거두게 됩니다. 치료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병원이 있는 이웃 마을과는 산이 막고 있어 돌아가야 했고 거리는 약 72km 떨어져 멀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다쉬라트 만지히는 1960년 평범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웃 마을 사이에 있는 산을 뚫어 길을 내겠다는 것이였습니다.
만약 바로 가는 길이 있었다면 아내를 치료할 수 있었겠지만 길이 멀어 안타깝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게 된 만지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겪게 하면 안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산을 뚫어 길을 내겠다는 그의 손에는 큰 망치와 정 등 보잘 것 없는 도구가 전부였습니다.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산을 뚫어 길을 내겠다는 그를 보고 미쳤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길을 내면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고 자신의 부인처럼 병원에 가지 못해 소중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22년간 90m의 산을 깍아 드디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1982년. 길이 100m, 폭 9m의 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데 불과 3km 밖에 되지 않고 60개 마을 주민들이 이웃 마을에 의사를 찾아가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약 70km를 돌아가지 않고 이젠 이 길을 이용해 5km로만 가면 됩니다. 2015년 8월에 인도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만지히'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이렇게 끝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줍니다. 정말 산을 뚫고 마지막 작업을 할 때 그 감격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여러분 앞에 산과 같은 엄청난 장애가 막혀 있다면, 여러분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빨리 포기하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접습니까? 주님이 그냥 그렇게 쉽게 접을 일을 여러분에게 제시하셨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해도 주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일을 우리 주님은 절대 포기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끝까지 이루십니다.
(예화)1949년 중국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강제 추방을 당했습니다. 눈물을 안고 추방을 당한 선교사들이 있었고, 중국의 기독교 선교는 끝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끝이 아니셨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심한 박해와 핍박은 오히려 중국 기독교를 강하게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지키는 신앙을 가졌고, 이를 통해 중국은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가 확산될 때 100 만명 정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많고, 바른 속도로 기독교가 확산이 됩니다. 현재는 1억 명이상의 중국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기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진행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13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이 중요한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시작만이 아니라 끝도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과 마침도 주님이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격려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 끝을 봐야 합니다.
시작만 좋다가 끝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절대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끝을 향해 가시는지 우리는 잘 살펴 보았습니다.
모든 고난을 결코 피하지 않고, 순전히 고난을 다 감당하신 그 예수님...
그 예수님과 함께 지금 달려야 할 그 길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의 끔에서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오늘도 힘을 내어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 주님이 부르신 그 일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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