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주연과 조연 사도행전 13:1-3
사도행전 13장 1절에는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먼저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입니다. 우리가 보통 영어 단어에서 흑인을 이야기 할 때, 니그로(Negro) 라는 단어는 보통 흑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검다’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을 아프리카 출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대 자료를 살펴보면, 이 ‘흑인’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역사적인 자료들이 많습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 시절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 흑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쉽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이런데 초대교회 시절에, 특별히 단일민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기고만장한 유대인들이 이 흑인출신의 시므온을 자신들의 말씀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 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레네는 지금 아프리카 이집트 옆 리비야의 수도 트리폴리의 옛 지명 이름입니다. 루기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하게 사용된 전형적인 로마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아프리카 사람이 어떻게 로마사람의 이름을 쓸수 있느냐를 연구한 결과 많은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는데 하나는 아프리카 사람이 로마사람의 양자가 되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경우는 아프리카 사람이 로마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 로마식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후자에 비중을 두고 이 구레네 사람 루기오를 노예 출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안디옥 교회가 이 노예 출신의 구레네 사람 루기오를 자신들의 영적 스승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분봉왕 헤롯의 젓 동생 마나엔”입니다.
성경에는 헤롯 가문이 4번 등장합니다. 첫대는 예수님 탄생시에 예수님을 죽일 때 나오는 헤롯 대왕입니다. 권력 욕심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당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의 말에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씨앗이라고 판단하여, 두 살 아이의 남자 아이 모두를 죽이도록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이 헤롯 대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분봉왕 헤롯으로 자신의 조카와 결혼 것을 질책하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후임자라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죽일 계획에도 가담하고, 실제로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불리하도록 방치한 인물입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헤롯 아그립바 1세로 헤롯 대왕의 손자인데,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사도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둡니다.
네 번째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2세도 당시 교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주던 권력의 중심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헤롯 가문과 엮인 역사적인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게 되는 상황입니다. 분노가 치미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 가문의 사람, 마나엔이 안디옥 교회의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안디옥 교회는 이 마나엔도 말씀을 가르치기에 지도자로 받아들입니다. 그 가문의 이야기만 들어도 지난 시간 동안 저지른 일들이 생각나서, 선입견이 너무나 큰데, 지금 그 가문의 사람이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네 번째 등장인물이 바로 사울입니다.
헤롯 못지않게 정말 그 이름조차 듣기 싫은 사람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오게 만든 사건이였던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모두가 다 안디옥으로 쫓겨 왔다면,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울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이 사울 때문에 정들었던 고향도 떠나고, 그리고 갑자기 나오느라 재산도 잃은 사람이 많고, 그 모든 것을 누구에게 따지고 보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사울인데,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 사울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가장 많이 돕는 후원교회의 역할까지 감당합니다. 우리가 바울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바울이 사울이였을 때의 행실을 다 알고도 그를 공동체에 받아주고, 그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제대로 된 사역자가 되도록 섬긴 안디옥 교회의 영성이 더욱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서도 꽤 인정을 받은 사람이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부터는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 부흥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소개해 주는 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4:36-37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지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그를 부를 때 위로자, 곧 바나바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그가 당시 박해와 어려움 속에 성도들을 위해 참으로 많은 위로의 섬김이 있었음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물도 교회를 위해서 헌신 할 줄 아는 사람이였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땅은 매우 중요한 자산 가치인데, 이것을 팔아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을 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 예루살렘교회도 초기라 어떤 원칙이나 규정이 정확하게 세워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모이고, 가난한 자를 돕던지, 사도들을 도울 때 재정이 필요했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소유를 정리해서 교회 공동체에 드렸습니다.
바나바는 당시에 교회에서 그 온화한 성품과 섬김으로 사람들이 바나바를 보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박해를 피해 모인 자생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교회가 되었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없어서, 이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소위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적인 권위로 파송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의 사도적 권위는 굉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는 이미 교회에서 신뢰를 얻었고, 사도들에게도 그 권위를 인정받아서, 안디옥 교회에서 당당하게 주연으로서 리더십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좀 더 깊게 파고 들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실제적인 탑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모든 기득권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안디옥 교회는 5인 지도체계를 세웠습니다. 흑인, 노예출신, 원수의 가문, 가해자 당사자 등, 한자리에 앉아 있기 정말 힘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안디옥 교회를 오히려 주안에서 하나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가장 많은 영향력을 내었을까요?
그 지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리더로 세울 때, 실제적으로 누가 제일 많은 역할을 했겠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누구의 눈치를 제일 많이 보았겠습니까?
저는 바나바를 주목합니다. 다른 네 명과 바나바는 분명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약점이 있었다면,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바나바 독주 체제의 일인 지도체계를 세워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바나바가 주연보다는 조연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섬겼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나바가 핍박자 사울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역자가 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로 세워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결국 바울이 되어 주연이 되고, 바나바는 조연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연을 해야 될 사람이 조용히 조연으로, 조연을 주연처럼 세워주었을 때 이 안디옥 교회는 교회역사에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교회사의 역사에서는 먼저 ‘예루살렘 교회’가 등장을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직제자들이 활동을 하고, 베드로가 설교하면 하루에 3,000명의 신자들을 얻을 정도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이 안디옥 교회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빈약합니다. 예수님의 직제자가 설립했다기 보다는 핍박을 피해 자발적으로 발생한 교회였습니다. 초라한 개척 이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도에서 한인 이민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을 하다보니, 안디옥 교회가 아주 좋은 모델이였고, 이 안디옥교회를 안디옥 교회되게 했던 리더십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안디옥교회는 교회사에서 엄청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를 통한 “기독교의 세계화”가 시작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 예루살렘에 머물던 예루살렘 교회가 규모면에서는 엄청나지만, 오늘날까지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결과를 보면, 해외 이민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의 역사로 전 세계로 교회가 확장된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문화의 타락과 이방 민족들의 정신적 공황기에 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의 활동과 모습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온 인류가 받아들일 영적인 가치관으로 전해지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어집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전체를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이 로마의 중심세력에서 벗어나고, 로마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없는 존재들이였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는,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를 냈고, 역경과 환난을 이겨내고 200여년 지나면서 안디옥 학파를 형성하여 바질, 크리소스톰 등 많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이 안디옥 학파 출신 학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350년이 지나면서 안디옥 시 전체가 기독교화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 전체가 기독교화가 되었다는 말이 실감이 잘 나지 않으시죠?
저는 인도에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힌두교가 80%이고, 모슬렘이 15%인 인도에 100%의 기독교인을 가진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 북동부에 미조람 종족”이 있습니다. 인구 100만 정도가 되는 해발 1,400미터의 산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100% 크리스찬 지역인데, 인도의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미조람이 인도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헌금을 드리는 것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을 하면 80억에 이릅니다.
지난번에 이 지역을 책임지는 주지사 가정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주지사가 아니라 거의 기독교 사역자 같았습니다. 주 업무보다도, 이 지역에서 인도 전역에 1000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표이고, 성서공회 사역, 인도 기독교 지도자로서 사역을 하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이 미조람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싸움을 좋아하는 부족이고, 종족끼리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사냥을 하던 잔인한 사람들이였습니다.
1891년 영국의 웨일즈 장로교회의 윌리암 윌리암즈 목사가 사역 중에 한 달 정도 미조람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짧은 한 달이지만, 윌리암즈 목사의 선교보고로 웨일즈장로교회는 인도의 미조람 종족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윌리암즈 목사를 미조람에 선교사로 파송을 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윌리암즈 목사는 죽게 되어 그 계획은 중단이 되어집니다.
웨일즈장로교회는 3년이 지난 뒤에 미조람에 대한 비전을 멈추지 않고,1897년에 존스 선교사를 미조람에 파송하게 됩니다. 미조람 기독교인들에 의한 부흥이 꾸준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웨일즈장로교회는 1913년에 지금의 미조람의 수도격인 아이졸에 선교센터를 봉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의 자료들을 보면 웨일즈장로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는 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냥 인도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100%인 지역이라고만 알려지고 있지, 누구도 이 웨일즈 장로교회의 일은 잘 소개되지 않습니다.
130년이 지난 지금, 누구도 잘 모르는 이야기 이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윌리암 윌리암즈 목사님의 한 달의 미조람 방문사역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있었던 것은 한 달이지만, 그 한 달의 경험들을 교회에 보고했을 때 웨일즈장로교회가 오랫동안 미조람을 품고 미조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웨일즈장로교회가 한 달의 인도 경험을 보고한 윌리암즈 목사의 보고를 잘 듣고 품고, 그곳에 선교사를 보내고, 사역을 지원하고, 센터를 세워준 일들이 이루어졌듯이, 오늘 여러분이 듣게 되는 여러 지역의 선교보고와 사역에 대한 소식들은 언젠가는 이 미조람의 역사처럼 또 다른 큰 선교의 역사로 이어질 줄 믿습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들려지는 귀한 선교에 대한 말씀들을 귀하게 여길 때, 웨일즈장로교회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어떤 선교보고를 하느냐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귀한 보고에 응답하는 웨일즈장로교회의 귀한 자세가 더욱 필요합니다. 선교사들이 선교 보고를 하는 것은 자기 간증, 자기 자랑, 자기 힘든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교 보고를 통해서, 계속적인 하나님의 사역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한 달의 선교 보고가 130년 뒤에 인구 100만의 100% 크리스찬 지역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듣고 반응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웨일즈장로교회의 수고와 헌신입니다.
웨일즈장로교회의 사역은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에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고 우리에게 좋은 선교의 모델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간혹 교계나 선교계의 선교적 상황을 보면 위험한 선교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현지인을 통한 교회와 성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 주도에 의해서 선교사가 주연이 되는 사역들을 보게 됩니다. 선교사가 중심이 되고, 선교사의 업적만이 기억이 되는 사역들....
보통 사람들에게 미조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미조람 교회의 선교역사에서 웨일즈 장로교회나 윌리암 윌리암즈 선교사나 존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미조람 그리스도인들이 주도가 되어서 이렇게 되어진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을 파송하고, 후원하고 뒤에서 지원한 웨일즈장로교회 입장에서 보면 무척 섭섭한 일입니다.
지난 시간, 저는 인도에서 경험한 선교사역들 가운데 배운 부분이 이런 것들 이였습니다. 우리가 주연이 되지 말고 조연이 되는 것...., 모두가 주연이 되려고 할 때, 남들이 안하는 조연을 하려고 하는 것, 남들에게 보이는 사역이 아니라, 귀찮고, 티 안나는 사역들, 이러한 사역들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도에서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예 마음을 낮추고 조연이 되려고 하니, 다툼도 없고, 오히려 더 많은 사역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와서 하고 싶은 많은 인도에서의 이야기들도 있지만, 다 뺐습니다. 선교사가 입을 열면 닫을자가 없다고 합니다. 저도 제 사역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데, 원고 6장 분량을 삭제했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사역하는 이야기는 네이버와 다음에서 검색어로 “델리한인장로교회”를 치면 저희 교회 홈페이지가 나오고, “우리교회 이야기” 라는 부분을 검색하면, 매주 되어진 이야기를 연재하듯이 늘 기록을 해 놓습니다. 매주 빠지지 않고 기록을 해서, 혹 관심이 있으시면 조금만 수고해 주시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일일이 소개하는 것보다는 그 하나 하나의 일을 경험하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마음, 인도에서 사역하는 저의 자세가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연이든 조연이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배역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드라마를 완성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조연으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가는 단역배우로 쓰시기도 하고, 때로는 몸이 망가지고, 어려움을 많이 당하는 주연으로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배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인도에서 주님이 주신 배역에 충실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사역, 선교사님들을 위한 세미나나 정기 모임을 잘 하도록 뒷 받침을 해주는 것, 단기선교팀이 한국에서 오면 힘든 일은 우리 교회가 맡고, 선물이나 좋은 것은 선교사님께 연결해 주는 일들, 인도 교회를 건축하려고 할 때, 우리 교회 공간도 제대로 없으면서 인도 교회 건축을 도왔던 일, 선교사 사모님을 위한 일, 주변에 암에 걸려서 신음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돌보는 일, 사소하지만 선교사님들에게 결정적인 문제들을 같이 고민하고 처리해 주는 일, 우리 교단 선교부에 관련되어 신입 선교사님들이 정착하는 일이나, 아니면 총회장님과 같은 분들이 오실 때, 이런 저런 일을 조율하는 일 등 많은 부분에서 티도 안 나고, 보이지도 않는 일에 주님께서 주시는 배역을 충실하게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때로는 주연의 자리를 포기하니까 조연으로 서러움도 많이 겪습니다.
감사한 것은 제가 시간이 갈수록 선교사로서 경험되어져야 할 일들을 하나씩 겪으면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어려움도 처해보고, 위기도 겪어보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궁핍함에 처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동안교회 부목사로서, 총회에서 본부 선교사로서 근무할 때와는 다르게 현장에서 선교사로서 경험되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겪고 있습니다.
힘든 일도 있지만, 보람됩니다.
간혹 인도에서 잠을 자다가 옛날에 큰 한국교회에서 일하는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예배 하나를 드리려고 해도 한국보다 10배 이상의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정전도 되고, 주방이 없는데서 밥을 해야 하고, 교회 점심을 전기 밥솥에 밥을 하다가 전기가 나가기도 하고, 차가 없는 교인들 차량 연결하는 것, 빌려 쓰는 교회 건물 주인과의 실랑이, 쥐와 모기와의 싸움(낮에 물리면 댕기, 저녁에 물리면 말라리아...), 매주 하나씩 터지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그런 일을 겪다보니, 가끔 옛날에 한국에서 사역했던 생각이 마음속에 쌓였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 꿈이라도 꾸고나면 기분은 좋은데, 자고 일어나서 겪는 현실은 정 말 다릅니다. “뭐 하나를 사기 위해 2-3일이 걸려야 하고, 48도가 넘는 더위속에 숨이 막히기도 하고, 쉽게 될 일이 처리 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다시 해야 하는 일을 매번 겪습니다. 정말 한국에서는 한 시간이면 처리될 일을 일주일씩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도 땅에서 하나님이 매일 매일 대본을 주시고, 하나님의 드라마에 쉼 없이 배역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너무나 귀하고, 감사합니다. 주연이 아니라도, 조연으로, 때로는 단역배우 같은 엑스트라로라도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축복의 비결을 발견을 하게 되었는데, 주님이 주신 배역에 충실을 하니까,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갚아 주셨습니다. 섬기는 일을 하다가 무시를 당하면, 하나님이 따로 정산해서 갚아 주셨습니다. 척박하고, 황량한 인도이지만, 하나님은 그 안테나를 더 곤두세우고, 저희들을 지켜보시고, 돌보아 주심을 늘 경험합니다.
인도에 있다보니, 한국에서 보지 못한 여러 가지 관점들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나 사회, 그리고 정치의 현장에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모두가 너무 주연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혹은 자기가 원하는 배역만 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를 해도 모두가 주연을 하려고 합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조연을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주연배우만 넘쳐납니다. 수 많은 조연이 있어야, 주연배우가 살고, 그로인해 영화가 살아날텐데, 다 주연을 하려고 하고, 하고 싶은 역할만 하려고 하니, 모두가 다 사는 것이 아니라 다 죽습니다.
오늘 우리는 웨일즈장로교회의 귀한 조연의 모습,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가 주연이기보다는 조연으로, 주님이 맡겨주신 배역을 겸손하게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던 일들, 자기 배역에 맡은 일에 충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이루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찾아야 할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주연을 고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조연을 원하시면, 우리는 조연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믿음을 가져야 될 때입니다.
주연을 억지로 고집한다든지, 쉬운 배역만 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연이든 조연이든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감당하는 삶의 자세를 우리가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도 땅에서 사역을 하는 배역을 맡겨 주셔서, 그 일을 담당하고 있구요,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에서 분명하게 맡기신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해야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배역에 우리는 주연이 아니라 섭섭해 하지도 말고, 조연이라 대충하지도 말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의 주연이니까, 선교사에게 다 맡겨 놓는 것이 아니라, 선교후원을 하고,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배역에 정말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충실해야 합니다.
이 영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배역에 충실할 때, 그리고 그 분께 전적으로 순종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무슨 배역을 맡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 배역에 충실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폼 안나고, 성에 안차서, 그냥 방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작은 역할이라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여러분이 주님이 맡기신 그 역할에 충성할 때, 그 모습을 통해, 여러분의 안디옥 교회, 여러분의 미조람, 여러분의 웨일즈장로교회의 역사를 그 어딘가에서 또 다시 그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 역할을 잘 감당하여, 우리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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