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0일 계시록 3:20, 예수님은 분명하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만남”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시는 ‘만남’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오셔서 그 어떤 유물이나, 건축물이나 상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사람들을 만나는데 사용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 따로 구별하거나, 필요한 사람을 만나지 않으셨고, 다양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만나셨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 만남들을 통해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사람’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사명’을 만나게 되어집니다. 그 사명을 만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던 삶의 자세와 분명하게 바뀌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이 많다고 말씀들 드렸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그 인생에 분명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만난자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은 그 귀중한 ‘만남’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탄절을 기억할 때마다. 그냥 탄생신화처럼 축하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창조주이시며, 온 세계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의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도록,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우리가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으로 구별이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자의 삶이 있고, 둘째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이 하나가 더 존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는데,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시려고 오랫동안 문을 두드리셨지만, 결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쌩’ 합니다.
성화 가운데 이 요한계시록 3:20로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는 내용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는데, 예수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이 문은 참 특별합니다. 문을 여는 손잡이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안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 열어 줄 때만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충분히 이 문을 손도 대시지 않고 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문이 안에서 스스로 열리기까지 항상 기다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도무지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문을 열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오늘날 터키의 한 지역인 라오디게아라는 곳입니다. 이 지역에는 아주 유명한 명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시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볼리가 있습니다. 많은 양의 석회질이 오래동안 물속에 침전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 되어집니다. 약 100m 높이에 이르는 백색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 장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 덮인 것 같아 '목화성'이란 뜻의 '파묵칼레'로 불립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중앙 군사도로가 통과하여 해안을 닿는 지역이라 교통, 통신,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검은색 양모의 생산지로 당대에 제일 부자들의 동네였습니다. 이 도시에 금융 자산도 풍부해서 어마어마한 금액의 신용장도 이곳을 통해서는 돈으로 바꿔 갈 수 있는 지역이였습니다. 실제로 AD 17년에는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복구작업을 할 때, 다른 지역이 로마의 도움을 받아서 복구 작업을 했지만, 이곳은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모든 복구 작업을 마쳤을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이곳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는데, 눈과 귀에 특효약이 생산이 되었고, 거기에 관계된 여러 상품들이 생산이 되면서, 당시에는 정말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는데 대부분이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도시 전체에 대한 우월의식들 때문에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여유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면서 얻게 되는 풍요로움과 자기들 스스로 노력을 조금만 하면 충분히 여유를 가지면서 살 수 있기에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려는 열정”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는 거는 잘 삽니다. 그리고 그냥 부족한 거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찾지 못하고‘그냥 살다가 죽는 인생’으로만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인 ‘진실되게 주님을 만나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내 인생을 계획하시고,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그 주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그럭저럭 살다가 죽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나라’ 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의 만남’ 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거 없어도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나 은혜’ 그런 거 없어도 그냥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적용) 우리도 혹시 그러지는 않습니까? 없고 부족하지 않으니까? 그러한 것들이 휩싸여서, 우리 인생에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인데, 보지 못하거나 놓치는 것이 혹시 있지는 않습니까?
이 라오디게아에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 문제였습니다. 도시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물을 얻는데, 부족한 물을 위해 온천수에 돌로 된 송수관을 연결해서 섞어서 사용을 하는데, 이 물이 항상 미지근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그 미지근한 물과 같이, 이들의 신앙도 미지근했습니다. 세상적인 것도 적당히 섞고, 신앙적인 것도 적당히 섞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을 많이 하셨습니다.
계시록 3:15-16“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적용) 그런데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말씀에 사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않고, 적당하게 만나서, 그럭저럭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 주님이 책망한 라오디게아 교인의 모습과 같지는 않은지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진심으로, 진실되게 예수님을 만났는가?”를 되물어야 합니다. “나의 삶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그냥 한 번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명상의 장소로 오는지, 아니면, 고아원이나 구제시설을 방문해서 선행을 하면, 마음이 좋아져서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분명히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우리도 정말 미지근하게 믿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경 사례) 성경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인데, 예루살렘에 있던 최고의 중앙 재판소로서의 권위를 가진 곳입니다. 여기에는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제사장 가문의 출신, 서기관, 율법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서 71명으로 구성이 됩니다. 옛날, 광야에서 모세를 도왔던 70인 장로들로부터 그 역사를 시작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기관입니다.
이런 기관의 일원인 니고데모는 겉으로 볼 때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권위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내면에는 최근에 듣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와 가르침을 듣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밤에 남들이 보지 않는 저녁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납니다.
요3:1-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이 전해 주거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특별히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지금 자기 앞에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일을 그냥 그럭저럭 넘기거나, 대충해서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되어지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일인지를 감안하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진실되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자기가 살아왔던 삶에서 얻을 수 없었던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집니다.
(적용) 오늘 우리 앞에 되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이 되는데, 우리가 그냥 그것을 대충 생각하고, 그럭저럭 생각하고 넘겨 버리는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살아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 ‘인생 헛 살았다’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예화) 지난주 목요일에 GSS를 다녀왔습니다. 박선희 선교사님이 돌아가셔서, 사실 이번성탄 행사를 할까말까를 고민을 했었다고 합니다. 작년처럼 학생들 부모님을 모시고, 지역주민의 잔치가 되게는 하지 말고, 학교 안에서 검소하게 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200-25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자신들의 교장 선생님인 한국 선교사님이 돌아가신 것을 아이들은 잘 모르는 분위기였습니다.
맨 마지막에 선데이 스쿨 아이들의 펀자비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끼리 춤을 추었는데, 작년에 이 춤을 출 때, 바로 1년 전에 故 박선희 선교사님이 그 자리에서 같이 아픈 몸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게스트들의 인사들이 이어질 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故 박선희 선교사님을 기억하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좁은 교실에 모인 아이들을 위해서 흘린 땀과 사랑을 보면서,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지만, 여러분들이 故 박선희 선교사님의 열매”입니다. 라는 말씀에 GSS의 선생님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닦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48세의 젊은 나이에 주님 곁으로 가신 故 박선희 선교사님을 ‘인생 헛살았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귀한 일을 하였고,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도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제대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쫓아서 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아야지, 우리 주님께 책망을 받는 삶으로 계속 살아야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20절에 나온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에서 나온 이 “먹으리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원래 헬라어에는 세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아크라티마스’는 간당하게 빵을 음료에 찍어 먹는 정도의 아침을 이야기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점심을 표현 할 때는 ‘아리스톤’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주로 집 밖에서 먹는 간단한 음식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저녁이라는 단어는 ‘데이프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가족들과 화목한 분위기에서, 여유있는 시간 가운데 먹는 식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와 같이 먹겠다라는 이 단어는 이 ‘저녁’을 의미하는 ‘데이프논’에서 온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만나서 문을 열면, 그냥 때우기 식의 간단한 음식이 아니라, 정말 풍성한 음식에 격이 없는 대화로 예수님과 가족같은 관계로의 만남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 없이 먹는 음식은 우리가 아무리 잘 먹은 것 같아도, 늘 배가 고픕니다. 계속 갈증이 나고, 더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 어떠한 것보다도 더욱 풍성합니다. 한 번 맛을 보면, 다른 것이 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식탁은 영원한 생명의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약에 뭔가 허기지거나, 갈급하거나, 채워지지 않았다면,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관계는 맺고 있지만, 교제가 없는 삶이 이렇습니다. (예) 부모님과 자녀는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영원한 부모님과 자녀의 관계도 불편한 사이가 되어서 교제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교제가 끊어지면, 관계는 있어도 불편합니다. 그런데 교제가 회복이 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과도 관계만 맺어 놓고, 교제가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관계는 맺어 놓고 주님과 교제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제는 세상이 주는 물질 속에서 얻는 풍요, 사람들을 통해서 채워지는 썩어질 것, 금새 다시 목마를 것에 의존해서 계속 목마른 인생을 살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목마르지 아니할 영원하신 주님의 식탁에 문을 열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2015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의 문을 제대로 열고 주님을 만났습니까? 혹시 주님을 우리의 마음 문에 들어오시라고 하고, 말 한 번 걸지 않고, 주님을 쌩하고 모시고 계신 분들은 없습니까?, 아직도 주님과 서먹한 분들이 계십니까?
이번 성탄절은 그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만남이 다시 시작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대화도 더 많이 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듣고, 주님이 함께 하신 교회와 공동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루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년 우리의 성탄절은 이 요한계시록 3:20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이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 다시 한 번 마음을 드리고, 주님과 참된 만남을 가지겠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귀중하고 복된 날로 기억하며, 믿음을 키워나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즐겁게 주님 없이 보내는 날이 아니라, 나를 만나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기념하며, 그 주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지겠다는 다짐을 하는 소중한 결단을 하는 믿음의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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