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1일 베드로전서 2:4-10
우리는 간혹 드라마를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았다가,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인생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베드로 전서를 통해 당시 여러 가지 핍박과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소개해 주고, 특별히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난을 받을 때에는, 혼자 있는 것 같고, 외롭고, 버려짐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결코 그렇게 버려지거나, 외로워하거나, 소외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벧전 2:4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라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을 설명하는 가운데 베드로 사도는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벧전 2:6-8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여기에서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모퉁잇 돌, 둘째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됩니다.
모퉁잇 돌은 말 그대로 건물의 모퉁이에 세워진 기둥을 받쳐주는 돌입니다. 건물을 유지하고,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모퉁이 돌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 모퉁잇 돌이 분명하게 서 있지 않다든지, 부실하면 집이 망가집니다. 현대에는 이 모퉁이 돌의 개념이 건물의 기초공사라고 일컬어지는데, 현재 세계 최고의 빌딩이라는 158층의 두바이의 브르츠 칼리파에는 “사막 아래로 6m만 내려가면 단단한 석회암 지반이 나오는데, 여기에 총 3,192개의 대형 콘크리트 말뚝을 지하 50m까지 박았다고 합니다. 건물 바로 아래로 192개, 나머지 3000개는 건물 주변 지하에 박았습니다. 이 말뚝 하나 무게는 3000t에 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삐쭉 쏟은 빌딩 같지만, 그 빌딩 주변에 엄청난 기초 공사가 받쳐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퉁잇 돌은 이처럼 눈에는 잘 모이지 않지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과 삶에는 너무 너무 귀중한 모퉁잇 돌과 같은 역할을 해 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내부 인테리어를 잘하고, 다른 것들을 잘 가꾸어 놓아도, 이 모퉁잇 돌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자꾸 다른 것을 올리거나 세워 놓으면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꾸 남들에게 보이는 그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돈도 좀 많아 보이고 싶고, 남들보다 좀 더 공부를 한 것처럼 보이고도 싶고, 이것도 저것도 부족하면, 남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자신의 무엇인가를 세워서, 그것을 무기로 삼습니다. 그런 것들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고, 보이고 싶어 합니다.
“하버드 스토리” 라는 책을 보면 한국 학생들이 하버드에 들어오기는 하는데, 많은 한국 학생들이 하버드를 점수로만 들어오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하버드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버드에서 요구하는 것이 공부 점수만이 아니라 배우려는 태도, 남들과의 친화력, 그리고 봉사활동, 음악과 체육, 그리고 임원 활동 등을 통해 리더십을 배워가는 것을 중시 여기는데, 한국 학생들은 점수에만 집착하기에 하버드에 들어와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남들에게 높은 점수로 주목을 받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자기만 알고,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매너 없고, 배려 없고, 앞과 뒤가 다른 행동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위해서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신의도 저버리고, 쉽게 쉽게 주변 친구들을 소홀히 대하기에 , 자기 스스로 고립이 되고, 함께 공동 과제나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이기적이니까 사람들이 잘 끼워주지 않고, 결국 그룹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점수만으로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건물에서도 잘 눈에 뛰지도 않고,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도 않고, 심지어 요즘의 현대 건물에는 땅속에 박혀 버리는 이 모퉁이 돌의 중요성은 너무나 무시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인테리어의 비싼 장비가 되기를 원하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파 묻혀 버리는 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눈에 드러나 보이고 싶어 할 때,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 모퉁잇 돌을 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인도에서도 우리 교회가 여러 사역들을 섬기고 일을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일이 잘 되게 하는 방법은 모퉁잇 돌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에게 잘 안보이고, 자기 이름 내세우지 말고, 드러나고 싶을 때, 조용히 내려놓고, 위로 받고 싶을 때, 인정받고 싶을 때, 자기의 욕망, 자기 과시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래서 때로는 무시를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이 무시를 하는 것 같아도, 이 일을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위로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모퉁잇 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순간순간들을 겪으면 마음이 많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밟고 올라갑니다. 잘 보이는 곳에는 자신들을 높여 달라고, 알아 달라고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잘 되려면, 낮아져야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되려면 손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아시고, 다른 것으로, 생각지 못한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델리한인장로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잘 보이는 인테리어의 상징물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기초를 놓으며 모퉁잇 돌과 같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와 우리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교우들의 역량이 늘어나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사님들도 그래서 우리 교우들을 많이 찾습니다. 그리고 교회일도 점점 우리 교회 성도들이 하나씩 하나씩 맡아서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인사회에서도 뭐를 필요로 하는데, 우리 교회의 힘을 필요로 할 때가 많습니다. 북인도 선교사 협의회, 한인교회 연합회 등에서도 우리 교우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알고, 많이 의지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많은 분들이 이 일에 전문가를 찾으면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해결을 받습니다.
간혹 가다가 좀 무리하게 부탁을 할 때도 있어서 속상하지만, 그것은 상대방들의 역량과 매너 문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모퉁이돌과 같이 보이지 않는 일을 섬기는 우리 교우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인 가정, 직장, 학교와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곳에서도 이와 같이 모퉁잇 돌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목 받고, 상징적인 인테리어 물건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모퉁잇 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도 인테리어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쁜 인테리어가 잘된 곳을 좋아합니다. 맛있는 집보다는 인테리어가 잘된 음식점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진도 예쁜 인테리어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제가 직접 인테리어 샵들을 방문을 해서 물건들을 살려고 하면 꼭 망설여집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제 머릿속에는 “이게 꼭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계산 직전에 집었던 물건을 내려놓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이처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에 투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삶이..., 모퉁잇 돌이 되어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고만 받는 성도들, 세상 사람들이 핍박하고, 사자 밥으로 던져 버리고, 재산을 몰수하고, 십자가 형에 처하고, 죽은 시체와 묶어 놓고, 어둡고 컴컴한 감옥에 그리스도 때문에 갇히고, 불안정한 생활로 제대로 생계수단도 만들어지지 않은 성도들, 세상 사람들이 마치 부서지고, 깨친 거친 돌처럼, 아무것에도 소용이 없다고 여기는 그 그리스도인 성도들에게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 사건은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존재감 없이, 쓸데없이 되어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보일지 몰라도, 벧전 2:3에 나온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라고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 죽인 것을 이야기 하면서, 오늘도 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우신 산 돌” 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사람 들이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베드로 전서 당시 세상 사람들과 같이 건축자의 버린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 같은 것으로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합니다. 왠지 예수님이 자꾸 우리에게서 뭔가를 가져가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꾸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 10:10을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흘러가는 세상에 인테리어처럼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모퉁잇돌과 같이 정말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인테리어 소품의 비참함이 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너무 예뻐서 샀는데, 시간이 지나고, 눈에 익을수록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이 나오면 바꿔 버립니다. 그래서 먼지가 쌓이고, 결국 폐기처분이 됩니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주인에게 버림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자기 자신에게 변화를 주려고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명품 인테리어도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인생이 이렇게 헛된 것에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과 공동체의 기둥을 바치는 모퉁잇 돌, 주초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좀 더 황당한 것을 우리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주님은 반지, 목걸이, 악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나를 받쳐주기 위해 그 분을 나의 액세서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 분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고, 지키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인생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퉁잇 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흔들리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되도록 우리 주님은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심을 분명하게 붙들어 주실 분이십니다. 그 주님을 신뢰하고, 그 주님께 나오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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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모퉁잇 돌로, 주초로 삼은 우리에게 주님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온 우리들에게 주님은 그냥 “너희도 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처럼, 어디 한 번 힘들어봐라,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그런 모퉁잇 돌이 한 번 해봐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하게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한 네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택하신 족속, 둘째는 왕 같은 제사장, 셋째는 거룩한 나라요 넷째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리 귀중하게 보고, 존귀하게 본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은 정말 모순 덩어리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하는 것 같지만, 늘 죄악에 치우치며,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간혹 항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는 깨끗하다고..”. 하지만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미 우리는 수 많은 사건과 보도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 확실하고, 한계가 많은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 5일전에도 미국에서 11세짜리 소년이 8세 소녀에게 강아지와 좀 놀아도 되겠냐고 묻자? 8세 소녀가 거절을 했고, 이에 흥분한 11살짜리 어린이가 권총으로 8세 소녀를 쏴서 죽였습니다.
(예) 지난주에도 우리가 사는 인도 남부 안드라 프라데시주(州)에서 칼리라는 피와 복수의 신에게 제물을 받치려고, 4살 짜리 남자 이이의 머리를 베어서 제물에 바쳤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모두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인간에게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의 신분에 대한 분명한 변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게 하시고,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신분을 우리에게 불러 주신 이유를 벧전 2:9에 설명하고 있는데 이유는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던 우리를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있고, 이렇게 귀중한 신분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상승된 이 신분으로 그냥 잘 누리고, 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아직도 어두움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삶에서 우리에게 도우시는 그 하나님을 모릅니다. 우리의 진로와 형편을 도우시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그 주님을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귀한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과 오늘의 성도들이 이 귀한 아름다운 소식을 아직도 어두운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용규 선교사님과 박종호 찬양사역자님을 초청하여 귀한 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 청소년들이 연합해서 모이고, 8월에 어린이들과 MK들이 모였고, 10월에 나이스크를 통해 한인교회 교우들과 선교사님들이 연합을 하여 모여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 빛을 모르는 분들에게 이 빛을 소개하는 일을 남겨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빛을 소개하라고 우리에게 귀한 분들을 보내 주십니다.
사역을 할 때마다 큰 힘이 들고, 여러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비쳐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떠서 주님을 만납니다. 이번 나이스크에 간증들이 주보에 글이 실리는데 정말 은혜가 되고,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성도들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듣고 싶어 하십니다.
너희에게 준 혜택만 누리고 살지 말고,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주님께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주의 택한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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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우리의 신분에 대한 아주 분명한 말씀으로 더 해 주고 있습니다.
벧전 2:10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긍휼을 얻은 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도 땅에서 인도 사람이 아니기에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1년 비자가 대부분이라 인도에서 인도 백성처럼 살려고, 우리가 FRRO에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사업하시는 여러분들도 나름 힘드시겠지만, 우리 선교사들은 얼마나 맘을 졸이는지 아십니까? 이 땅에서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거주 허가증’을 주는데, 와서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인도 백성으로 살려면 너무나 힘이 듭니다.
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중동,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수 많은 난민은 정말 ‘나라’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난민 가운데 아이를 앉고 헝가리 국경으로 넘어오는 한 아버지의 발을 헝가리 여기자가 발로 걸어 넘어 뜨렸습니다. 이 일로 전 세계가 또 한 번 흥분을 했습니다.
8월말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을 시리아 난민들이 넘어오려다가, 공기 주입이 되지 않는 냉동차를 타고 도망 오다가 다 냉동차 안에서 얼어 죽은 71명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나라가 없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마도 이 난민들과 같이 이스라엘을 떠나 여러 지역으로 오늘날의 난민과 같이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정처 없고,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그들에게 이 베드로 사도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긍휼을 얻은 자” 라는 이 메시지는 얼마나 당시에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백성, 긍휼을 얻은 자” 라는 메시지가 당시 그들에게만 큰 힘이 되는 메시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 베드로 사도의 메세지는 너무나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특히, 주님의 나라는 우리 육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날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까지 인도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 귀한 소식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소식입니다.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긍휼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명한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을 보면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같이 읽기)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백성, 긍휼을 얻은 자로 이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인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가족으로, 한 백성으로 묶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아, 그 분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로 굳건하게 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모퉁잇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반대로 인테리어와 같이 보여지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퉁잇돌과 같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둘째는 모퉁이 돌 같이 주님을 따를 때, 세상은 우리를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신분을 분명히 정해 주셨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그리고 이렇게 축복해 주신 이유는 아직 어두움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빛을 비추라고....
셋째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자로 확증하셨습니다.
이 귀한 사실들이 우리의 삶에 그냥 지나치는 삶이 아니라, 새겨지며, 실천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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