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4일, 사무엘 하 6:1-14, 자기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일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분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의 방법과 생각에 의존해서 일 처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은 잘 마쳐지지만 그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고, 사람이 드러나게 되거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방법이 아닌 경우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 어느 장로님의 성경책을 보았는데, 성경을 아주 많이 읽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보았는데, “로또” 용지였습니다. 제가 그 로또를 보고 한마디를 하니까, “잘 되면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 결혼식장을 좀 규모 있게 하시던 분이 계셨는데, 결혼식장의 특성상 거의 주일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추워질 때가 되면 교회에 상당한 양의 쌀을 교회에 기증해 주십니다. 트럭으로 쌀 차가 오고, 교회 앞에는 매년 그 분이 기증한 쌀이 일정기간 쌓여 있고, 교회는 그 분으로 인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줍니다. 참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지만, 예배자의 자리에서는 잘 뵙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되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우리식으로 드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알려 주신 방법으로 주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간혹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일을 진행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가 되어집니다.
오늘 본문 앞장에는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되어지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블레셋과의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6장에서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법궤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 37:21-22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궤 안에는 내가 너에게 줄 증거판을 넣어 두어라. 22 내가 거기에서 너를 만나겠다. 내가 속죄판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할 모든 말을 너에게 일러주겠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증거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두 돌판을 이야기 합니다. 이 법궤는 당시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였습니다.
사실 법궤는 오래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고, 이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갔지만 이 법궤를 블레셋군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지닌 블레셋에 이상한 징조들이 나타나서, 이 법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냅니다. 벧세메스라는 곳에 도착한 직후에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으로 보내지고,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이 되어집니다. 20여년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서, 이 이스라엘의 통치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분명하게 선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궤를 이동하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바르게 잘 되어지고, 동기도 바르게 진행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고, 신실한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의 정욕과 욕심이 들어갑니다.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서 정치, 군사, 그리고 종교적인 부분에서 자신을 좀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예전부터 법궤는 법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성소의 모든 기구를 운반하고 보관하는 책임을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이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예전에 이방땅 불레셋에 이 법궤는 암소 두 마리의 수레에 실어서 옮기는 방법을 택해서 법궤를 옮깁니다. 이 행렬에는 무려 30,000명이라는 무리가 동원이 됩니다. 아주 성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 통치자 다윗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아비나답도 자신이 이 법궤를 자신이 20년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은근히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이 수레를 몰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지정한 봉사자가 아닌 사심을 가진 사람이 법궤를 운반하게 됩니다. 삼하 6:3,4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30,000명이 동원되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의 향렬에 가장 주목을 받는 법궤를 맡은 자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정말 은혜로운 일이였고, 실제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성대한 찬양이 함께 하였습니다. 삼하 6: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너무나도 멋진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려하고, 의미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던 행사에 소위 말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됩니다. 성경에 내용을 그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6:6,7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행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지나가던 행렬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가장 핵심이 되는 법궤를 움직이는 수레를 이끌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4:15을 보면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법으로 함부로 하나님의 성소나 법궤를 만지지 못하도록 알려 주셨고, 정해진 사람만이 이를 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다윗과 아비나답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역대상 13장 1-3을 보면 다윗이 이 법궤를 옮기기 위해서 지휘관과 온 이스라엘의 회중에게 분명히 물어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13:1-2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옮기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다윗은 그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과 권력을 드러내고 싶었고, 아비나답의 경우도 20년간 이 법궤를 지킨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 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획한 가장 그럴듯한 이벤트가 완전히 대형사고로 중단이 되어집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성경은 다윗이 분노하고 혈기를 부립니다. 사무엘하 6:8을 보면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성대하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했는데, 웃사가 갑자기 죽게 되고, 행사가 중단이 되자, 하나님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주시지 않고, 이렇게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에 너무나 분노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죽이지 않으셨더라면..” 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모든 백성 앞에서 당한 이일로 인해 너무 너무 수치를 느꼈습니다.
(예) 지난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개막식 행사중에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를 상징하는 행사를 하는 중에 한 개가 작동이 안되어서 4륜기로 되는 해프닝으로 수백억을 들인 개막식 행사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2010년 벤쿠버 올림픽 개막식 때도 4개의 횃불 주자가 성화대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4개가 나와야 하는데, 3개만 나와서 한 사람은 횃불만 들고, 멍하게 있다가 들어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의 실수로 전체 행사를 망가지게 하는 사건들입니다.
준비한 사람들이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문책을 받았겠습니까?
오늘 다윗도 이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멋있게, 폼나게 하나님을 빙자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엉망이 되니, 다윗은 분노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고, 여기까지 오게 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감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다윗의 편에 계셨습니다. 목동시절의 맹수와 추위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적장 골리앗을 넘어 뜨릴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사울의 질투심으로 쫓기는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다윗의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법궤 이동 사건에서 당한 일은 다윗에게 적지 않게 큰 충격이였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거부감’을 경험하지 못했던 다윗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감이였습니다.
(적용)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사심이나,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일이 경험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내세우고, 상대방을 누르고, 멸시하려고 할 때,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도, 그 동기가 순수하거나 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오늘 다윗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약간이라도 우리의 사심이 들어간 것이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너무 너무 쉽게 우리의 방법대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번에 나이스크 예배 회복 컨퍼런스의 주제가 “주께로 더 가까이” 였습니다. 예배 회복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우리가 자꾸 주께로 나아가는 방법을 우리의 생각대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고, 해 오던 방법들이 있는데, 이 예배를 우리의 편리에 맞춰서 바꾸고, 우리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바꾸어서, 너무나 쉽게 쉽게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우리가 점점 예배의 참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서구 찬양 사역자들이 너무나 현대 음악으로 바꾸어서,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찬양들, 세상적인 지식과 흥미와 오락을 첨가한 말씀들, 헌금을 온전히 드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이리저리 바꾸어서 드리는 모습들, 봉사를 해도, 무슨 이익이나 관계를 따지며 섬기는 오늘날의 우리의 자세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기 마음대로 정한 그 한 가지 방법이 결국 전체를 망치게 하는 요소가 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참된 방법과 삶을 따라야 합니다. 자꾸 자꾸 내 생각대로 변화를 시키면 안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절감을 당한 뒤에 다시 조심조심 하나님의 마음을 살핍니다.
먼저는 법궤 이동 행사를 중지 시킵니다. 사무엘 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궤를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둡니다. 사무엘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오벧에돔을 축복하십니다.
법궤를 지니고 있는 것이 축복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감사함으로 법궤를 맡은 오벧에돔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성경 사무엘 하 6:11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무슨 축복을 받았을까요? 막연한 복이 아니라 성경은 그 내용도 기록을 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 하 6:12을 보면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라고 합니다. 이 구체적인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질 정도로 오벧에돔이 축복을 받게 되었고, 다윗은 이것을 계기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다시 법궤를 옮길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에 30,000 만 명의 그 화려함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타내고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하 6:13을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행진”을 위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중심으로 법궤를 이동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무엘하 6:13절에 나온대로 “여 섯 걸음”을 간 뒤에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을 조심스럽게 가는데, 지난번의 웃사의 급사 사건이 반복되지 않자, 다윗은 이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비록 ‘여섯 걸음’ 밖에는 안되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받아 주셨다는 그 사실에 너무 너무나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 간혹 부부싸움을 하면 부부가 말을 하지 않을 때 있습니다. 신경전을 벌이면, 하루 이틀 말을 안 하기도 하고, 길게 가면 한 달씩 가기도 합니다.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말을 서로 안하고, 살 때 얼마나 긴장감이 돌고, 초초하고, 조심스럽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지고, 사랑의 마음이 회복이 되면, 살짝 살짝 찔러봅니다. 그러다가 피식 웃습니다. 그리고 말문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이 경험을 안해 본 청년과 청소년들....이 고통과 기쁨을 아마 모를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완전히 거절당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엄청난 불상사를 겪지만, 이제 하나님께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겨우 여섯걸음이지만, 그들에게 그 어떠한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갑니다.
(적용)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하나님께 온전치 않은 방법으로 나아가시다가. 이렇게 다윗처럼 주춤하고, 혹시 다윗이 자기 잘못임에도 분노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하나님께 혈기를 부리고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여섯걸음’이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주일성수를 제대로 안하신 분들이 있다면, 이제 마음을 정돈하고, 온전히 주님께 집중을 하고 여러분의 ‘여섯걸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 찬양생활, 봉사생활, 헌금생활에서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께 이 다윗의 ‘여섯걸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방법이 문제인데, 내가 잘못해 놓고, 하나님이 나를 안도우신다고 주저앉아 있지마시고, 살짝 살짝 ‘여러분의 여섯걸음’을 걸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안 읽던 성경도 조금씩 읽어보시고, 안해보던 봉사도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예배를 위한 자세도, 늦게오고, 집중하지 않았다면, ‘여섯 걸음’을 걸었던 것과 같이 조금씩 더 다가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으로 여섯 발자국을 걸어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이 걸음을 축복하십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니 얼마나 좋았던지, 성경에는 다윗의 삶 가운데 가장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무엘 하 6:16절부터 나옵니다. 얼마나 뜨겁게 찬양을 했던지, 부인인 미갈이 왕이 체통 없이 군다고 구박을 할 정도로 엄청나게 기쁘게 찬양합니다.
주님을 회복하는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을 우리의 삶에도 회복하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의 겉모습, 그럴듯한 모습,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형편에 맞추는, 우리의 사심이 들어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윗처럼 늘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의 방법으로 대체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대로, 온전하게 주님께 나아가며, 배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오늘 다윗의 회복의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고하기